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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40)] 냉전에서 화해로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6.24 10:36 | 최종 수정 2019.07.03 16:59 의견 0

아데나워 총리는 선거강령에서 공약한대로 1955년 소련과 외교관계 수립 시에도 동방정책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아데나워 총리가 소련 총리 불가닌에게 보낸 서신은 서신 형식을 취함으로써 소련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 서신에서 아데나워 총리의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독 정부와 소련 정부 간의 외교관계 수립이 양측의 현 영토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 영토의 최종확정은 평화조약에 유보되어 있다.

서독 정부와 소련 정부 간의 외교관계 수립이 국제문제에서 서독 정부가 독일 국민을 대표하는 권한과 서독의 실효적인 주권 밖에 있는 독일 영토의 정치적 조건에 관한 서독 정부의 법적 관점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아데나워 정부의 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은 특히 폴란드와의 국경인 오데르-나이쎄 선을 인정하는 등의 현상유지(satus quo)에 반대하고, 1973년의 독일 영토 수복을 목표로 하며,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으며, 나토와 유럽통합 등 서방으로의 편입 정책에 바탕을 둔 ‘힘의 우위 정책(Politik der Starke)’으로 소련과 동독의 굴복에 의한 재통일로, 중립화 반대였다.

아데나워의 통일 정책은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나토와 굳게 결속된 서독이 힘의 우위 정책에 기초하여 자석처럼 동독을 흡수한다(아데나워 ‘자석 이론’)는 것이었다. 이 정책 개념을 1950, 1960년대에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은 서독이 독일문제를 나토의 도움을 받아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선전했다.

이는 기본법에 규정된 침략 전쟁 금지뿐만 아니라 1954년 10월 3일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과 브뤼셀 조약 가입 시 ‘두 조약의 방어적 성격과 양립될 수 없는 어떠한 수단의 사용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무력사용 포기에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아데나워 정부의 정책기조로 유지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시에 아데나워 총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하여 “서방의 방위 태세, 힘의 우위, 폭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서방의 무조건적 결의, 서방과 우리의 결속이 평화유지의 믿을 만한 보장이다”라고 이 정책을 거듭 확인하였다.

그러나 냉전이 고착화되면서 동서진영의 대결이 각 진영 내에 경제에 압박에 더하여 피로감을 주게 되고 쿠바 미사일 위기로 대결이 비현실적임이 드러났다. 각 진영은 내부 관리로 눈을 돌리면서 점차 동서해빙의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흐루쇼프는 동서해빙 의사를 표명하였다.

1959년 9월 25~26일 이틀 동안 미국의 캠프 데이비스에서 베를린 위기와 관련하여 열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총리 간의 회담에서 냉전이 거론되었다. 이 때 발표된 공동성명은 두 지도자가 “이 회담이 많은 주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데 유용했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의견 교환이 각자의 동기와 입장을 더 잘 이해하고 따라서 정의롭고도 항구적인 평화의 성취에 기여할 것임”을 기대하였다. 특히 두 사람은 “일반군축 문제가 오늘날 세계의 당면 과제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정한 협정이나 조약은 없었지만 두 나라는 베를린과 기타 문화교류와 교역에 관련된 의제에 관한 대화를 재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두 사람은 또한 가까운 장래에 정상회담을 다시 열기로 합의하고 아이젠하워는 다음 해에 모스크바를 방문할 것이라 발표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회담이 조성한 희망적 낙관주의-캠프 데이비드 정신-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 5월 소련은 소련 영공에서 미국 정찰기 U-2 기를 격추하고 조종사를 생포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처음에 소련 상공의 첩보 비행에 관해 아는 바 없다고 하여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이젠하워의 모스크바 방문 계획과 마찬가지로 제네바에서의 정상회담 일정이 취소되었다.

또 1961년 9월 25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유럽의 안전보장에서 다른 측의 ‘역사적이고 정당한’ 이해관계를 인정하며 서베를린의 자유와 연합군의 주둔 및 베를린 통행을 위한 평화적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의 의미는, 소련과 동독의 관계는 역사적이고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분단과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평화적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11월 25일 케네디는 소련의 <이스베스챠>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독일 통일 허용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중부 유럽의 평화는 소련과 서방이 베를린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면 가능할 것이라 발언하였다. 독일을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이는 또한 독일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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