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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민중은 교회에 돌을 던졌다

조연호 작가의 <한국 교회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 (86)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19.11.12 16:20 의견 0

개신교 자체가 새로운 권력층이 된 이후 교회는 분열되었고, 경쟁이 시작됐다. 세속 권력은 이 경쟁을 잘 이용해서 최종권력을 획득해 나간다. 기독교는 세계의 보편적 종교에서(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뜻이 ‘보편적’이다) 이제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경계선이 됐다. 국가 위에 존재했던 신을 숭배했던 종교가 이제는 철저히 세속 군주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제 국가와도 분리돼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세속화된 프로테스탄트교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권력자와 결탁하거나, 비위를 맞추면서 세력 유지를 도모했다. 20세기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나치즘과 결탁했던 독일교회가 대표적이며, 한국 교회도 일제 억압기 동안 신사참배를 했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의 안위를 위해 구국기도회를 개최했으니, 독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세계 선교에 있어서 최고라 하는 미국도 자본주의 정신에 기독교 윤리가 적용돼 해석되었으니, 세속화된 것이다. 그리고 세속화된 기독교는 철저히 부자의 편에 섰다.

그래서 일까? 과거 세계 선교 1, 2위의 영예를 얻었던 미국과 한국의 지니계수는 여타 선진국에 비해 높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한국에서 유교에서 추구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고지론’으로 변형했고, 미국은 ‘부’를 이루는 것이 청교도적인 정신의 실현이라고 하면서, 부자가 되는 것을 은혜이자, 청교도로서의 삶을 제대로 사는 거로 인정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조차 종교적으로 원천봉쇄 해버렸다(실제로 자선 행위를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적 논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논리는 노예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됐고, 현재까지도 인종차별이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우리가‘천민자본주의’라고 할 때 미국식 자본주의를 말하는데, 가장 기독교적인 국가에서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가 형성됐는지 관련해서 따져보면, 미국 기독교 정신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독교가 이렇게 되 버린걸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십자가 해석도 한 몫한다. 십자가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 속죄양 의미가 있다. 이 속죄양 의미를 쉽게 해석하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른 공동체 구성원이 '잘'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 받았다는 의미의 적용이다. 이러한 십자가는 결국 희생양을 선택하게 만들고, 경제적 논리로 변형되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풍요롭게 살 수 있으니 희생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된다. 이 논리대로라면, 적은 수의 희생이 필요할텐데 현실은 99%이상이 그런 희생자가 되고 있으니, 맞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에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구성돼 있으며, 표지에 실린 인상 좋은 저자의 미소처럼 긍정적인 마인드로 매사 생활하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린다는 내용이었다. 왠지 그 이후에 유행했던 뉴에이지 도서『시크릿』과 크게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는데,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전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이고, 후자는 우주의 힘이 돕는다는 것 정도가 다르다(전 박근혜 대통령도 우주의 힘 이야기를 했는데, 비슷한 취지였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전작이 잘 팔려서였는지 『잘 되는 나』를 출간했고, 이 책은 전작의 신비주의를 넘어서 어떤 분야에서든 1등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오스틴 목사의 기독론은 성공을 위해 예수의 십자가를 철저하게 자본주의식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분은 미국의 보수적 신앙관에 빗대어 볼 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울러 한국 교회의 성장론과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 과거 국민일보에 서울대 법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을 크게 보도한 적 있는데, 좋은 대학에 입학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근거는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논리대로 따지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은혜와 거리가 멀다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신약에서 예수는 가난한 자, 여인, 어린이, 병든 자들의 친구였지, 성공한 사람들의 친구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성공 중심적인 인생을 은혜로 전파하는 교회의 교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기독교는 권력의 최고 자리에 앉아 있다가 타의로 겸손히 몸을 낮추게 된다. 그리고 군주들의 휘하에서 잘 적응한다. 그래도 국가는 교회가 필요했고, - 통치하기 위해서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필요해서 - 교회는 국가를 위해 충분히,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이러한 교회의 역할은 혁명이 발생하면, 성난 군중들이 왜 교회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원인이 된다. 발전적 보수주의자였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 성찰』을 통해 혁명의 부당성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교회를 침탈한 민중들에 대해 이성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버크의 비판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프랑스는 명확한 미래에 대한 설계 없이 권력층과 교회를 붕괴시켰다. 그러한 무주공산 가운데 공포정치가 들어섰고, 결말은 나폴레옹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한 것이었다.

교회가 중세 시대 절대 권력의 일선에서 밀려난 건 사실이지만, 핵심 권력층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권력의 지각변동이 발생하면 민중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교회는 민중의 편에 서지 않고 권력의 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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