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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11)] ‘한국인’과 ‘한국어’로 준비한 학원의 20번째 생일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4.04 14:14 의견 0

앞서 말했듯 한국인끼리 모임을 가져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다가오는 학원 20주년 개원기념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각 나라별로 그 나라 문화를 주제로 교실을 꾸미고 선생님들이 1,2,3등을 선정하여 상품을 준다. 나는 원체 상 욕심도 의욕도 없는 터라 굳이 이렇게까지 시간 내면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열심히 의견을 모으고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모습들을 보니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열심히 하는 척만 했다.

나온 의견을 종합해 보니 K-POP(교실에서 노래 재생 및 아이돌 브로마이드 전시), 한복 체험, 태극기 그리기, 무궁화 꽃들로 벽 꾸미기 등이었다. 임원()같은 분들이 재료를 사오고 우리는 학원 일정이 끝난 후 교실에 모여 무궁화를 만들었다. 방과 후라 한국어를 써도 되는데 나는 그게 불편했다. 싫다고 이런 환경.

나는 극단적인 면이 있어서 조짐만으로 극단의 상황까지 상상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내 상상력은 발동되어 저 끝까지 갔다.

남들이 다 한국어 쓰면 나 또한 분위기에 쉽게 휩쓸려서 경각심을 잃고 한국어만 잔뜩 쓰게 될 테고, 그러면 내 영어실력은 늘지 않고, 늘지 않으면 학원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힘들어지면 학원가기 싫고 영어에 흥미도 더 떨어지고, 그럼 내 성적과 영어실력도 같이 떨어지고, 그러면 나는 영어를 못하고, 영어를 못하면 일을 못 구하고, 일을 못 구하면 돈이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나는 노숙자가 되어야 하잖아!

여기까지 생각이 마치니 더욱 하기 싫어졌다. 이거 꼭 해야 하나 사정 있다고 하고 그냥 빠질까

근데 이거 하다 보니 좀 재밌는 거 같기도 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완성되어가는 예쁜 무궁화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접은 무궁화는 빗자루가 되어 마음 속 가득했던 불평불만들을 쓸어담았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집에 가서 더 열심히 공부 하면 되는 거고. 잠깐 한국어 쓴다고 영어 실력이 떨어진다면 그건 내 실력이 아니었던 거지. 쓸데없는 불평불만을 내려놓고 나니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일희일비 하는 단순한 사람이지만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아주 작은 불만이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거기에 짓눌린 적이 수없이 많았던 터라 이런 변화는 참 고맙고 반갑다.

혹시라도 부정적인 생각에 잘 지배되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얼른 그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하길 바란다. 그럼 마음이 점차 가벼워지고 온전히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황금같이 귀한 시간 불평만 하다 보내기에는 아까우니까. 시간이 지나면 뭐가 그리 불만이었고 싫었는지 기억도 안 날 텐데 말이지.

종이 무궁화 꽃은 또 다른 효과를 냈다. "이러다가 우리가 일등 하는 거 아냐"라며 헛된 희망 던지기. 고작 꽃 몇 송이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치솟았던 걸까.

사실 큰 기대는 없었기에 '에이 설마 그럴라구요'라고 작은 찬물 한 바가지를 준비해놨다. 근데 여기저기서 "어머 진짜 그러는 거 아냐", "그래 1등 할 수 있지. 1등 상품 우리가 갖자!"며 기대에 가득 찬 반응들이 나왔다. 나는 머쓱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얼른 찬물 바가지 버리고 동참해야지.

"대박! 1등 상품 뭔데요 진짜 우리가 1등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