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설명하지만 거버넌스의 등장은 거버먼트의 한계 때문이었다. 20세기 후반(1980년 후반에서 1990년대 초) 거버넌스 개념이 등장했다. 이 시기는 우연히도 냉전이 종식될 무렵이었고, ‘정보’라는 말이 온 세상을 덮었던 시기다.
냉전의 종식은 이분법적인 논리로 모든 걸 무조건 해결해야만 했던 세계 흐름을 중단시켰고, 각기 서로 다른 실익을 추구하는 많은 주체가 등장해서 복잡한 니즈를 꺼내 놓을 거라고 예측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현실이 됐다.
이를 방관하기 힘들었던 거버먼트는 시대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고, 정치적 엘리트를 후원하는 지지자들(국민)의 요구를 거스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거버넌스를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했다.
권력은 그 특성상 변화를 싫어한다. 당연히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양한 특혜가 권력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권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철저히 특혜를 활용한다.
(최근 떠들썩한 법무부 장관의 사례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장관을 비판했던 자유한국당의 의원도 물타기라고 목청 높이고 있지만, 자녀 문제에 있어서 다를 바 없음이 밝혀졌다.)
거버먼트는 변화를 선도해야 하지만, 최대한 그 순간을 늦추려 한다. 적어도 본인들이 적응하고 새롭게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정권이 바뀌기도 하고, 최고 통치자가 탄핵되기도 하지만, 변화를 이끌어 갈 거버먼트 구성원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전부터 이미 거버먼트를 대신할 거버넌스가 등장했어도 제대로 조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 거버넌스에 한계를 가져오는 다양한 원인
그래서 거버넌스 한계의 첫 번째 원인은 호스트 문제이다.
거버넌스의 시작이 거버먼트 주도로 시작했기에 거버넌스는 거버먼트의 하위 기관처럼 느껴진다. 다양한 주체가 참여한다고 하지만, 그 참석 대상을 결정하는 주체가 거버먼트다. 그러다보니 거버넌스는 거버먼트의 입장을 잘 대변해줄 구성원으로 선발되고, ‘어용’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힘들었다. 아직도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앞서서도 지적했듯이 자원이 부족한 민간 영역에서 거버넌스를 자체적으로 조직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혹 조성했다고 했더라도 거버먼트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사멸 혹은 인멸(거버먼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멸 시킨다)하는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 자체가 목표와 목적이 있는 조직이다 보니, 실질적인 역량이 부족하면 구성원 결속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자진 해산하게 된다.
필자도 과거 신촌에서 ‘신촌 상생 협의회’라는 거버넌스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지역 단위였기에 ‘로컬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는데, 참석자는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상인연합회였다. 취지는 거버넌스를 조직해서 각 주체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진행하고, 공조체제를 확고히 해서 각 주체가 상생 방안을 제시하고 실행하자는 것이었다.
회의는 1년 가까이 진행됐으나, 적극적으로 자원을 운용할 기관이 없다 보니, 회의만 진행되고 실행되는 건 없었다. 결국,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자원은 거버먼트에 집중돼 있어서 거버먼트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면 거버넌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기관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요청해도 ‘장’의 의견과 다르면, 지원은 어렵다. 그렇게 장시간이 흐르면 처음의 열의와 의지는 꺾이고 수동적인 구성원만 남게 된다.
◇ 권력이라는 핵심자원을 나눠줄 수 있어야...
또 다른 문제는 참석자들의 니즈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거버넌스를 거버먼트가 호스트해서 조성했다고 하더라도 참석자들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방선거가 끝나고 나면, 자치단체장들이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서 추진단 형태의 거버넌스를 조성한다. 시각에 따라서는 거버먼트 하위 기관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서 발전적인 지방자치제를 논의하는 모양새니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참석 주체만큼이니 목적이 다르다.
사사로이는 인맥을 넓히기 위한 것부터 자치단체장의 의지를 확인하고 조력하는 지지단체를 조성하는 걸 목표로 하는 등 원래의 목적과 다른 다양한 목적이 있는 회의로 변질된다.
표면적인 목적은 지역의 발전이나, 실질적인 목적은 개인 혹은 단체의 이익 추구인 셈이다. 이런 경우 회의는 현란하게 진행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운영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심지어 환멸을 느끼는 구성원이 스스로 참석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거버넌스를 기획하는 공무원이나 참여하는 민간단체의 구성원도 본인들이 참석해서 의견을 나누는 회의가 거버넌스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버넌스는 거버먼트를 대신할 수 있고, 그만큼의 권한과 책임이 따르는 조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권력의 이행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쉽게 내놓는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지난 시대의 권력보다 많은 부분을 이양했다고 하지만, 그 권력을 나눠 먹는 무리가 약간 늘어난 것이지 혁신적인 수준은 아니다.
거버넌스는 권력을 분할받지 않으면 제대로 운영할 수 없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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