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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작성자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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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26)] 명량해전의 진실④ 강강술래와 왜군 즉시 철수설
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싸움으로 비유된다. 명량해전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고, 조선수군의 재기 발판을 마련하였다.그렇다면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1) 전선 수는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8.11 11: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25)] 명량해전의 진실③ 철쇄설은 역사적 근거 없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이겼다는 것은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쾌거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에 적었듯이 이는 천행(天幸)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이렇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해전에서 이겼기에 승리 요인으로 ‘철쇄설’이 등장한다. 명량해협의 가장 좁은 양편에 철쇄를 걸어 일본 전선 수백 척을 파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8.10 10:59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24)]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⑭
1889년 2월11일 기원절(紀元節)에 메이지 천황은 ‘대일본제국헌법(흔히 메이지 헌법)’을 발포했다. 일본은 1873년 2월11일을 기원절로 선포했다. BC 660년에 즉위한 초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은 전설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정부는 8세기에 편찬된 의 신무천황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원절로 삼은 것이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6.23 10:06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23)]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⑬
882년 3월14일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인솔한 ‘유럽헌법조사단’이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다. 이토를 포함한 10명은 5월 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 항에 도착하여 5월 16일에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프로이센 헌법학자 루돌프 그나이스트와 면담 후 5월 25일에서 7월29일 사이에 그나이스트의 제자 알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6.22 10:04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22)]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⑫
882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으로 건너가 헌법 기초조사를 하였다. 1883년 8월에 귀국한 이토는 헌법 초안 작성에 나섰다. 한편 1881년에 국회기성동맹을 모체로 이타가키를 당수로 하는 자유당이 결성되었다. 자유당은 사족과 부농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프랑스의 급진주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이어서 정부에서 파면당한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6.16 10:58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13)]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⑨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 문명개화(文明開化),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정부주도형 즉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 근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먼저 부국강병이다. 1873년에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20세 이상 남자는 황군(皇軍)으로 3년간 복무토록 했다. 1872년에는 병부를 육군성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4.07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12)]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⑧
일본인들은 새해 연휴에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하는 ‘하츠모우데(初詣)’라는 풍습이 있다지만, 300만 명이 메이지신궁을 찾는 것은 열광에 가깝다.메이지 시대는 일본이 스스로 ‘세계열강 대열에 오른 휘황찬란한 시대’로 평가한다. 특히 도쿄 사람들은 메이지 천황(1852~1912)을 사랑한다. 메이지 천황의 이름은 무쓰히토이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4.06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11)]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⑦
10월 15일 오전 10시에 각의가 개최되었다. 태정대신 산조는 고민했다. 다수결로 하면 즉각 파견 결정을 내려야 하고, 이와쿠라의 뜻을 고려하면 결정을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결정을 연기한다면 육군대장을 겸한 사이고와 군 지휘관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산조는 사이고의 주장대로 즉각 사절 파견을 결정했다.이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31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10)]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⑥
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주재한 일본 외교관이 본국 외무성에 조선관리가 일본을 모욕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각의가 열려 초량왜관의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파병 등이 논의되었다.이 자리에서 는 즉시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그 사절이 폭거를 당한다면 군사행동을 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자신을 전권대사로 보내줄 것을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30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9)]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⑤
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파견된 일본 외교관은 외무성에 보고서를 보냈다. 조선관리가 일본정부를 모욕하는 문서를 왜관에 게시했다는 것이다.동래부사가 일본 상인의 밀무역을 단속하기 위해 초량왜관 출입을 금한다고 게시한 문서에는 “요사이 저들이 하는 짓을 보니 가히 무법지국이라 할 만하다”는 표현이 있었다. 일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24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8)]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④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실은 사절단은 1872년 1월 18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1월 25일 백악관에서 그랜트 대통령을 예방하였고 2월 3일부터 국무성에서 조약개정을 위한 예비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외교교섭에 들어가자 미국의 대응은 엄중했고, 사절단은 냉혹한 현실의 벽을 실감해야 했으며 조약의 개정 협상을 포기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23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7)]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③
메이지 통치 45년 동안 일본은 놀랄만한 발전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경이적인 발전은 일본 민중의 정치적 무권리와 경제적 빈곤, 조선과 중국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 한 국가의 관점만이 아니라 민중과 아시아 민족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면, 메이지 국가는 전제주의·군국주의 그리고 침략주의를 국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17 10:52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6)]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②
메이지신궁은 메이지 천황과 쇼켄 황태후를 제신(祭神)으로 하여 1920년에 세워졌다. 당시에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라고 할 수 있는 도쿠토미 소호는 에 아래 글을 실었다.이제는 메이지 천황이 유신중흥의 대정(大政)을 펼치신 도쿄에 메이지신궁이 건립되어 메이지 천황의 신령(神靈)이 봉안된다. 실로 이것은 일본 국민에게는 수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16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5)]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①
메이지 신궁 입구에는 일본의 신사가 다 그렇듯이 입구에 도리이(鳥居)가 있다. 도리이는 우리나라의 솟대나 홍살문과 비슷하다. 그런데 도리이 위에는 금박의 국화(菊花)가 세 개 있다.국화를 생각하면 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1946년에 출간한, 일본문화의 유형을 밝힌 책이다. 그러면 국화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10 10:48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4)]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④
1592년 4월 1일 신립은 임금께 복명한 뒤 집으로 류성룡을 찾았다.류성룡의 저서 의 관련 부분을 읽어 보자.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09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3)]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③
1590년 2월 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禮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진도 사람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의 향도(嚮導) 노릇을 해왔는데 일본 사신 소 요시토시가 조선의 요구에 의해 잡아왔다.일본 사신은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공작새 한 쌍과 조총(鳥銃)을 바쳤다. 그런데 선조는 최첨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03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2)]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②
1591년 11월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1538∼1593) 등이 상소하였다. 상소의 요지는 축성을 중지시키고,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11월1일)먼저 축성부터 살펴보자. 1591년 7월에 선조는 호남과 영남의 성읍을 수축하였다. 비변사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자 호남·영남의 큰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02 10:00
시민칼럼/논단
[다시 보는 한일역사(1)]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①
1592년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대비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다.1591년 3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알현했다. 정사(正使)는 황윤길, 부사(副使)는 김성일이었다. 이들은 1590년 7월22일에 교토에 도착하여 11월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2019.03.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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