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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13)]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⑨

메이지시대의 부국강병·문명개화·식산흥업에 대하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승인 2019.04.07 10:00 의견 0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 문명개화(文明開化),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정부주도형 즉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 근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부국강병이다. 1873년에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20세 이상 남자는 황군(皇軍)으로 3년간 복무토록 했다. 1872년에는 병부를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했다. 육군은 독일을,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삼았다.

1878년에는 참모본부가, 1881년에는 헌병제도가 확립되었다. 1882년에는 천황의 이름으로 ‘군인칙유’가 발표되었다. 사무라이 정신에 입각한 충성심과 무용(武勇) 그리고 예의가 강조되었다.

두 번째는 문명개화이다. 1870년대 들어서 일본은 생활방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양식 단발머리, 양복, 모자, 구두 차림으로 그간 금기시되었던 소고기 음식을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또한 종래의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꾸었다. 1872년 12월3일을 1873년 1월1일로 정했다.

교통 통신도 근대화되었다. 1869년에 도쿄와 요코하마 간에 전신이, 1877년에는 전화가 개통되었다. 1872년에는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설되었다. 기관차는 영국에서 수입되었고 철로는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 부설한 협궤였다.

교육개혁도 이루어졌다. 1871년에 문부성을 설립하여 1872년 9월에 학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및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교육의 내용도 새롭게 바뀌었다. 1873년에 소학교가 1만2500개였고 취학률도 30%에 이르렀는데 1878년에는 41%까지 상승했다.

사립대학도 설립되었다. 1869년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의숙, 1875년에는 정지용과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의 도시샤 대학, 1882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가 도쿄 전문학교(와세다 대학)가 개교했다.

1890년에는 ‘교육칙어’가 공포되어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 교육이 이루어졌다. 문부성은 칙어를 전국 학교에 배포하여 의식 때는 반드시 칙어를 낭독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암기를 강요했다. 한국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1968년 12월5일에 선포했고 학생들은 이를 외어야 했다. 이것은 사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교육칙어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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