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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25)] 명량해전의 진실③ 철쇄설은 역사적 근거 없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승인 2019.08.10 10:59 의견 0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이겼다는 것은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쾌거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적었듯이 이는 천행(天幸)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이렇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해전에서 이겼기에 승리 요인으로 ‘철쇄설’이 등장한다. 명량해협의 가장 좁은 양편에 철쇄를 걸어 일본 전선 수백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쇄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철쇄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명량해전 당시나 직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난중일기>나 <선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없다.

둘째, 철쇄설은 18세기 후기에 이중환의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에 나오는데 내용이 황당하다. 우선 이중환이 1751년에 쓴 택리지를 보면 누가 보더라도 허무맹랑한 글이다. 그러면 <택리지>의 ‘팔도총론’, ‘전라도 편’을 읽어보자.

임진년에 왜적의 승려 현소가 평양에 와서 의주 행재소에 편지를 보내

“수군 10만 명이 또 서해로 오면 마땅히 수륙으로 함께 진격할 터인데, 대왕의 수레는 장차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였다.

이 때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 때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위에 머물면서 쇠사슬을 만들어 돌 맥 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적의 전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사슬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으므로 거꾸로 덮어진 것은 보지 못하고 다리를 넘어 순류에 바로 내려간 줄로 짐작하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 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돌아 나갈 틈이 없으므로 500여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모두 일시에 침몰했고 갑옷 한 벌도 남지 않았다. (이중환 지음 · 이익성 옮김, 택리지, 을유문화사, 2002. P 87-88)

이를 보면 이순신의 해전은 임진년(1592년)에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명량은 길이 1.3km, 입구 쪽의 폭은 약 650미터이며 가장 좁은 폭이 295미터인데 여기에 쇠사슬이 설치되었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다. 더구나 500여척의 왜선이 모두 침몰했다니 <택리지>는 너무 황당하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의 7대손 고정헌이 1800년에 편집 간행한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헤라클레스처럼 명량해협을 가로지르는 철쇄를 혼자서 자유롭게 걸고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김억추는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충무공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자는 뜻의 격문을 공에게 보내오니 공은 즉시 진도에 가서 만나 여러 방략들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쇠사슬을 명량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우리 배가 지날 때는 거두고 적의 배가 지날 때는 걸도록 하였는데 쇠사슬이 너무 무거운지라 여러 장수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때에 맞춰 걸고 거두는 것을 아주 쉽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그 용력의 절륜함에 탄복하였다.” (김동수 역.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p 197)

참으로 전쟁 소설의 한 장면이다.

아울러 이순신은 김억추에 대하여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9월8일의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밀한 사이라고 하여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셋째, 당시 조선 수군은 철쇄를 설치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함대는 8월16일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여러 번 진을 옮겨, 8월29일 벽파진에 주둔했는데 이때도 왜군의 공격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양의 철을 주조하여 쇠사슬을 만들고 물살 센 해협에 설치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철쇄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거지인 여수 돌산 앞바다에 철쇄를 설치한 것을 예로 들면서, 전라우수영에도 철쇄를 걸었을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전라좌수영의 철쇄는 항만 방어용이었고, 명량의 철쇄는 전투용이다. 아울러 여수와 명량은 물살의 속도와 해협의 폭 등이 달라서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

또한 최근에 공학적으로 명량해협에 철쇄를 거는 것이 가능한지를 여러 가지 각도로 검증한 결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학위논문도 발표된 바 있다. 철쇄설에 대하여는 이민웅의 <이순신 평전(성안당, 2012)> 346-349 페이지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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