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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11)]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⑦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승인 2019.03.31 10:00 의견 0

10월 15일 오전 10시에 각의가 개최되었다. 태정대신 산조는 고민했다. 다수결로 하면 즉각 파견 결정을 내려야 하고, 이와쿠라의 뜻을 고려하면 결정을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결정을 연기한다면 육군대장을 겸한 사이고와 군 지휘관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산조는 사이고의 주장대로 즉각 사절 파견을 결정했다.

이러자 이와쿠라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쿠보와 기도는 사표를 제출했고, 이와쿠라도 사의를 표하고 출근을 거부했다. 그러자 산조는 이와쿠라 집을 두 차례나 찾았고, 10월18일 아침에 갑자기 ‘정신착란’에 빠졌다. 20일에 메이지 천황은 위문 차 산조집을 방문했다. 이어서 이와쿠라 집으로 가서 그를 태정대신 대리로 임명했다. 모종의 모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10월 23일에 이와쿠라는 각의의 결정을 번복하여 내치 우선과 사절 파견의 연기를 천황에게 상주하였다. 24일에 천황은 즉시 재가했다.

이러자 사이고·이타가키·에도 등 소위 정한파는 분노했다. 그리고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일본 역사는 이를 ‘정한론 정변’이라 부른다.

한편 에토와 사이고는 메이지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먼저 저항한 이는 에도 신페이였다. 그는 1874년 2월에 사가의 변을 일으켰지만 패하여 효수되었다. 가고시마에서 반정부 세력을 구축한 사이고는 1877년에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의 원칙에 따라 무사에게 지급하던 녹봉을 폐지하고 1876년에 폐도령을 공포하여 무사의 상징인 칼의 휴대를 금지시켰다.

세이난 전쟁은 최후의 사무라이 반란이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쿠보도 1878년에 세이난 전쟁에 참여한 사족 6명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여기에서 기억할 일은 일본은 정한론을 연기한 것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875년 9월에 일본은 군함 운양호를 강화해협에 침입시켜 포격사건을 일으킨 다음 무력시위를 계속하여 1876년 2월에 ‘불평등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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