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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10)]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⑥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승인 2019.03.30 10:00 의견 0

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주재한 일본 외교관이 본국 외무성에 조선관리가 일본을 모욕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각의가 열려 초량왜관의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파병 등이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는 즉시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그 사절이 폭거를 당한다면 군사행동을 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자신을 전권대사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각의는 결정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사이고는 대신들을 설득하여 대세는 정한론으로 기울었고, 8월17일에 각의는 사이고를 조선 사절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태정대신 산조는 하코네에 머물고 있던 메이지 천황을 만나 재가를 요청했다. 그런데 천황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을 기다려 협의하고 다시 주청하라고 명했다.

이 시기에 정한론이 대두된 배경에는 급격한 내정 개혁으로 사족(士族)들의 반정부 감정이 격화된 사정이 있었다. 1871년 8월 이후 각 번의 사족이 해산되자 그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더구나 1872년 11월에 국민개병제 원칙이 발표되고 1873년에 20세 남자의 3년 병역의무를 규정한 징병령이 공포되자 전투 집단인 사족들은 실직하게 되었고, 불평사족(不平士族)의 수가 60만 명이 넘었으며 가족까지 합하면 300만 명이 규모였다.

이런 사족의 불만 고조는 자칫하면 내란이 일어날 지경이었는데, 사족에 우호적인 사이고는 사족의 불만을 조선 침략으로 잠재우고자 하였다.

9월13일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 순방에서 내치우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이어질 사이고의 조선 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10월14일에 각의가 열렸다. 이 각의에서 사이고와 이와쿠라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와쿠라 측은 사절 자체는 인정하되 그 실행은 러시아와의 현안인 사할린 문제가 해결된 뒤로 미루자는 파견 연기론을 내놓았고, 사이고는 사절 파견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산조는 참의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대부분의 참의는 사이고의 의견에 찬성했고. 오쿠보만 파견 연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산조는 전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음 날 결론을 내리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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