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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고현학] 온돌의 고현학

방랑식객 진지한 승인 2024.01.12 16:45 의견 0

고현학(考現學)이란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참된 모습을 규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고현학은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사안 하나를 주제로,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펼쳐보는 이색코너입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를 중심으로 정리해 넓고 얇은 지식의 층위를 높여가 보자구요!

겨울이 되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불 밖은 위험해!”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원한 귤을 까먹거나 뜨끈뜨끈한 군고구마를 먹으며 TV나 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사실은 온돌문화에서 나온 습관인데요. 지금은 보일러를 쓰면서 ‘아랫목’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지만, 지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당시 외국 선수들이 온돌바닥에 누워 몸을 ‘지지는’ 장면이 화제가 될 정도로 온돌은 획기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난방! 온돌의 고현학입니다.

(출처: 위키백과)


1. 온돌의 역사

온돌의 특징은 바닥 난방인데, 바닥에서 데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난방 방식입니다. 온돌의 기원은 청동기 시대와 삼국시대부터라고 해요. 부뚜막 형태의 화덕과 연기 통로로 구성된 온돌유적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무려 2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온돌이 생활 관습에도 영향을 주어 한국인들은 방바닥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좌식문화를 누려왔습니다. 집 안에서는 신발을 벗고 다니는 건 당연한 거였죠. 현대에 이르러서는 보일러와 온수 파이프를 활용한 ‘개량 온돌’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2. 열의 전도-복사-대류를 이용하는 온돌의 과학

서양에서 쓰는 벽난로는 가장 뜨거운 불 윗부분을 굴뚝을 통해 바로 내보내고 불 옆 부분만 이용합니다. 반면 온돌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워진 공기가 고래를 통해 지나가는데, 이때 방바닥에 열이 ‘전도’됩니다. 뜨거워진 구들은 열을 방출하는 ‘복사’현상을 일으키며 따뜻해진 방바닥의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이동하는 ‘대류’현상이 발생되면서 방 전체가 따뜻해집니다. 또한 온도는 물론 습도도 조절해 실내 환경을 쾌적하게 유지해 주며 ‘머리는 차갑게 발을 따뜻하게’하여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건강 건축’이기도 하지요.

3. 현대식 온돌 개발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1950년대 이후 우리 나라는 급속한 근대화로 연탄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부뚜막은 연탄 가스누출의 위험성을 갖고 있었어요. 중독사고로 삶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면서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도입된 것이 ‘온수순환식 바닥난방’, 조금 전에 말씀드린 ‘개량 온돌’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개발한 것을 역수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게 또 슬픈 역사적 사연이 있습니다. ‘온수순환식 바닥난방’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일본 제국호텔 건축을 의뢰받으며 나온 건데요. 호텔 건축을 구상하며 일본에서 머물게 된 건물에서 한국식 구들과 온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본의 거상이었던 오쿠라 키하치로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이 때 조선관이라는 별채에 머무르게 되는데 난로가 없는데도 실내가 매우 따뜻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문화재 중에서 경복궁 전각을 헐어낼 때 철거된 자선당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자선당은 조선시대에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처소였습니다. 건물의 철거작업을 맡았던 오쿠라가 이 건물 자재를 일본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조선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한 건 라이트는 이것이 ‘한국식 구들’이라는 것을 알고 회고록에 “한국의 방은 인류가 발명해낸 최고의 난방 방식이다. 이것은 태양열을 이용한 복사난방보다도 훌륭하다. 발을 따스하게 해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라고 기록해주어 온돌의 원조는 우리나라임을 밝혀주었습니다.

라이트는 미국으로 돌아가 바닥에 깐 돌 사이로 온수파이프를 통하게 하는 패널난방을 고안해 폭넓게 적용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역수입되면서 가정용 보일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4. <열하일기> 박지원은 온돌을 싫어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벽돌 건축을 찬양하며 한국식 온돌의 단점을 비판했다고 해요. 황토와 돌로 만들면 돌에 바른 황토의 두께에 따라 온도가 균일하지 않고 열이 여기저기서 새어나가지만 벽돌로 만들면 수수깡 몇 줌으로도 집안 전체를 달구기 좋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 내용만 가지고 온돌을 비하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실용주의를 앞세운 청나라를 배우자는 거거든요. 벽돌의 활용이라는 실용성에 관점을 둔 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5. 온돌이 만든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개화기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한 뒤 남긴 기록 중에 “벽난로에 비해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칭찬 외에도 “조선인들은 빵처럼 구워지는 것을 좋아한다”, “용광로에서 잠을 자는 기분이다” 등 특이한 경험담이 많았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손님이 오면 아랫목을 내주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불을 더 때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국인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한국 사람들은 쇼파에 앉기보다 바닥에 내려앉아 쇼파를 기대고 있다”인데요. 이 또한 바닥이 따뜻한 좌식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돌로 인한 생활이 가져온 라이프스타일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앉아서 생활하기 편하도록 바지 품이 넓어졌으며,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깨끗하고 위생적인 생활로 흰옷을 즐기는 백의민족이 가능해졌습니다. 온돌방 아랫목에 어른을 모시고 윗목을 젊은이들이 차지하는 장유유서 문화도 있었습니다.

난방공간을 최대한 집중해서 사용하게 되면서 방 하나를 다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불을 깔면 침실, 밥상을 놓으면 식당, 옛날식 책상인 서안을 놓으면 공부방이 되는 형태로 공간을 통합적, 다기능적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6. 가정용 보일러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우리나라에 근대적 형태의 보일러가 도입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보일러는 대부분 서양에서 들여온 증기 보일러였으며 백화점이나 영화관, 호텔 같은 곳에서 쓰이는 대형 보일러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당시의 산업적 여건 탓에 대부분 일제가 남기고 간 중고보일러를 수리하는 정도의 기술 수준에서 머물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가정용 보일러가 도입된 주택은 1961년 건설된 마포 아파트입니다. 마포아파트에 도입된 보일러는 연탄을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연탄가스의 유출 위험이 크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으나 차츰 그 편리함이 인정되어 일반 가정까지 연탄보일러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75년 이후부터는 석유가 보일러의 연료로 도입되면서 기름보일러 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름보일러는 연탄가스 사고의 완전한 예방과 연탄을 갈아주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1980년에는 주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가스가 연료로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초입니다. 1979년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정부가 에너지다원화정책의 일환으로 가스보급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면서 가정의 취사용과 보일러용 연료로 가스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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