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학번 건축가 고정림. 그가 한국에 돌아온 2005년은 우리나라 친환경 건축의 원년이었다. 판교 신도시 개발과 함께 친환경 건축이 제도화되고, 분양가 상한제에서 친환경 건축 인센티브가 도입되면서 모든 대형 설계·시공사들이 앞다퉈 뛰어들던 시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 폭탄'을 맞고 있어요." 고 대표의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20년간 SK케미칼, 현대자동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이케아 매장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맡으며 친환경 건축 컨설팅 분야의 개척자 역할을 해왔다.

■탄소 38%의 비밀

그가 건축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건축물이 전체 탄소 배출량의 38%를 차지합니다. 누구나 사무실이나 집에서 생활하잖아요. 여기서 줄일 수 있는 감축 효과가 어마어마해요."

문제는 제대로 된 기준이 없다는 것이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자체 ESG 기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내 설계사들은 그 기준을 알 방법이 없었다. 고 대표가 미국과 유럽, 중동의 각종 자격증을 따가며 공부에 매진한 이유다.

"평생 공부해도 기준이 계속 바뀌니까 또 공부해야 돼요. 그런 걸 한 번도 안 해본 분들이 플랫폼을 만든다고? 뭘 만들어낼 수 있겠어요?"

그의 말에는 20년 경험에서 우러나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실제로 현재 국내에서 ESG 플랫폼을 개발하는 회사 대부분이 IT 회사나 회계법인인 상황에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접근법은 차별화된다.

■스타트업의 현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2년 반 전 새롭게 스타트업을 시작한 그에게 지금은 '혹한기'다. PF(프로젝트파이낸싱) 중단으로 현장이 멈춰 서고, 시행사들이 줄줄이 망하면서 설계비 미수금이 쌓이고 있다.

"전에 회사에서는 150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40명으로 해야 해요. 견적 쓰는 것부터 모든 걸 제가 직접 해야 하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파리협약 등으로 법규가 강화되면서 ESG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기 때문이다.

■70가지 일의 비밀

고 대표가 현재 다루고 있는 업무는 공식적으로만 70가지다. 컨설팅에서 시작해 디지털 트윈, 탄소 금융까지 영역이 확장됐다. 마치 종합병원에서 여러 과가 협진하듯, 건축 분야에서도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현대자동차 GBC 프로젝트만 해도 50가지 업무가 발주됐는데, 그걸 다 할 수 있는 곳이 저희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여기에 디지털과 플랫폼까지 더해져서 70가지가 됐죠."

그가 추진하고 있는 ESG 플랫폼의 핵심은 정량적 평가다.

"기업들이 홈페이지에 'ESG 경영을 합니다', '탄소를 얼마큼 감축했습니다'라고 쓰지만, 제대로 된 검증 없이는 나중에 민사나 형사 소송을 당할 수 있어요."

■혼자가 아닌 함께

그래서 그는 생태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어요. 제가 앞단에서 추진하는 기관차 역할을 하려면, 중간 단계를 채워줄 파트너들이 필요합니다."

20년 전 혼자서 개척했던 분야가 이제는 산업이 됐듯, 그는 ESG 플랫폼을 통해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없는 일은 만들어내고, 있는 일은 엮어서 넷제로 기반의 ESG 생태계를 구축하고 싶어요."

건축가에서 ESG 플랫폼 개발자로. 고정림 대표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