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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논단] 데칼코마니(Decalcomani): 1905년 을사년, 을사년 2025년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5.01.02 13:43 | 최종 수정 2025.01.02 14:05 의견 0

2025년은 을사년이다. 그리고 120년 전 우리는 1905년 을사년을 역사의 아픔과 수치로 간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1905년은 역사학도들만 다루는 화석과 같은 유물이 되었고, 오히려 그 흔적을 양국의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지우려고 노력하는 세력이 설치는 세상을 목도하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현재 1905년의 기억에 대한 무게를 재본다면, 깃털만큼 가볍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현실은 120년 전 1905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제목에 데칼코마니라는 표현을 썼다. 1905년과 2025년은 유사하지만, 대한제국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이 진보한 점은 ‘백성’과 ‘국민’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을사늑약 후 기념사진


◆백성과 국민

현대 정치 용어에서 백성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입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백성은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다. 물론,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어서 백성의 뜻을 국가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백성은 모두 국가, 특히 왕의 재산과 같았다. 즉, 정치적 의식이 미약한 객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국민은 근대에 탄생해서 국가의 준인으로 간주된다. 국가의 3요소에 영토, 주권, 국민이 언급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으로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국민은 정치의식이 있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게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위탁해서 통치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백성은 왕을 함부로 바꿀 수 없었다. 바꾸더라도 같은 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은 정권을 바꾸고, 권력구조를 바꿀 수 있었다. 대통령 중심제가 의원내각제가 되고, 반대도 가능하다. 즉, 백성은 정치적 권리가 없는 무리로 정의하고 국민은 정치적 의식이 있으며 그 권한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정의하려고 한다.

◆대한제국 선포와, 비상계엄 선포

1897년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국내적으로는 국가 시스템이 거의 붕괴된 상황이었고, 국외적으로 열강의 침탈로 인한 국가가 피폐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상황에서 힘없는 왕이 제국 선언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고종은 위기 극복을 위한 여러 시도를 했는지도 모르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고 독살당한다.

2024년 12월 3일, 느닷없이 윤석열 대통령이 밤에 등장했다. 그러고 나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깜짝 비상계엄은 5시간 후 국회의 요청으로 해제된다. “왜 비상계엄을 했을까?”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싱겁게 끝난 계엄이었다. 이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헌법재판소로 넘겨졌다. 대한제국 선포와 비상계엄 선포는 무기력한 왕과 무능력한 대통령의 무의미한 외침, 해프닝이었다.

고종 황제와 윤석열 대통령의 유사함을 조금 더 찾아보면, 고종 황제한테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황후의 도움으로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후 황후의 인척들이 득세했고 친러 성향이었던 명성황후는 일본 건달들한테 시해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아내 김건희가 있고, 김건희가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데 분명 일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건희로 인해서 대통령은 추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여인의 힘은 남편을 정상에 올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후 추락의 길을 막는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유사점이 있다.

◆정치 분열

1905년과 2025년 정치 상황은 분열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갖는다. 친청, 친러, 친일 등으로 국내에서 세력이 나눠진 조선은 결국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대한제국까지 선포했지만,일본의 한반도 주도권 쟁취를 막지 못했다.

현재는 어떠한가?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 양당이 정치권력을 나눠 먹었고, 두 당을 중심으로 국론은 나뉘었다. 쓸데없는 소모전으로 인해서 정치적 자양분이 손실되고 있다. 정치 분열은 협상, 협치, 타협과 반대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권력 쟁취와 패거리 집단의 영달을 위해서 다른 쪽을 적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이 아니라 승자독식으로 인한 폐해, 특히 선거 후에 복수혈전이 계속 자행될 수밖에 없다. 복수를 위한 정치는 진보할 수 없고 정치를 뒷걸음질하게 한다. 불안한 공직자와 정치인들은 국익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 언제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르니, 소신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오로지 목숨 연명을 위한 정치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1905년 대한제국의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먹은 이유가 개인의 영달을 위함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자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2025년에는 을사오적을 넘어서서, 개인의 영달과 패거리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을사백적 이상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망상(妄想)이다.

을사오적 권중현·이근택·이완용·이지용·박제순


◆경제적 피폐

1905년 경제는 피폐한 수준을 넘어섰다. 여러 차례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화됐고, 그 이전부터 일본에서 갚을 수 없는 막대한 차관을 들여와서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차관을 갚기 위해 백성들이 나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025년 대한민국의 경제 전망 역시 밝지 않다.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서 달러 환율이 100원 이상 올랐다. 수출 중심 경제 상황에 짙은 먹구름이 낀 상황이다. 정국의 안정은 총리 탄핵으로 인해 더 어두워졌다. 예측 불가능한 국가에 어떤 투자자가 긍정적으로 관심 두고 지켜보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종종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악재로 작용해서 투자 불안 요소가 즐비한 상황에서 다가오는 을사년 경제는 오히려 IMF 당시를 떠올리게 할만한 요소들이 드러나고 있으니, 1905년의 경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경제 악화는 곧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원인이 된다. 대한제국 백성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면, 일제의 침탈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대다수 백성은 누가 통치해도 먹고 사는 게 어려울 테니, 최상단에 있는 계급의 변화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도 경제 침체는 정부에 큰 악재로 작용한다. 경제 안정에 실패하면 새로운 정부 역시 쉽게 무너질 것이다. 반근혜 탄핵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초기 지지율이 90%에 육박했음에도 5년 만에 정권을 넘겨줬다. 대한제국이 경제 붕괴로 곧 식민지로 넘어갔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경제 침체는 탄핵 이후 새로운 정부의 존립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민생 파탄

정치가 쓸데없는 정쟁의 장을 만들고 경제가 무너지면, 당연히 민생은 어려워진다. 현대 정치는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서는 정치와 경제를 구분했던 기존 정치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가 무너지면, 경제가 무너지고 민생은 더 어려워진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높은 수준의 고령화 시대에 들어서서, 생산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반대로 들어가야 할 기본 비용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 수치적인 경제 성장보다도 현실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치 분열의 상황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는 딴 나라 언어이다. 국익과 국민의 삶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300명+@ 패거리의 욕망이 꺾이지 않는 한 민생은 회복하지 못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도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사는 친일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 마찬가지다. 아무리 민생이 안 좋다 하더라도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된 300명+@가 버젓이 활동하는 2025년에 민생이 나아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담화


◆2025년 탄핵, 탄핵 이후

탄핵이 되지 않는다는 변수가 있지만,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의 권력은 임기동안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울러 탄핵이 안 될 정도의 대한민국 시스템이라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퇴보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해 보인다.

2025년 가장 눈여겨봐야 할 정치적 사건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이재명 대표 대법원판결의 선후일 것이다. 여당에서는 무조건 이재명 대표 판결 이후 탄핵을 바랄 것이다. 혹여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1987년 이후, 최고 수준의 피바람이 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대표 측에서는 탄핵을 먼저 시키고 대선 후보로 나가 대통령이 되어야 본인의 사법 리스크를 미룰 수 있다. 지난 대선 때도 죽기 살기로 맞선 두 적수가 다시 한번 탄핵과 대법원판결을 두고 겨루는 형태가 됐다. 어쨌든 탄핵이 되면, 집권당은 바뀔 테지만 그렇다고 정치가 발전하고 경제가 안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치권력 시스템 자체가 양당을 비슷하게 만들어서 계속되는 정쟁 속에 경제는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예를 들어 국민의 힘은 친미, 더불어민주당은 친중 정도). 그러나 목표 의식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패거리 집단의 영달이다. 그러니 대다수 국민이 염원하는 발전된 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한국 정치의 권력구조는 명확하게 한계를 보이고 있어서, 권력구조의 변화 없이는 어떤 정당이 집권해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은 탄핵이 되면, 현 정권에 대해 반대하던 대중과 윤석열 부부와 그 무리에 대한 분노를 가진 많은 국민이 잠시나마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지언정 유사한 다른 무리의 비슷한 통치에 울분을 토하는 상황을 면치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의 답답한 정치 행태에 또 다른 분노를 느낀 바 있다. 이제 다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문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성향의 대통령을 만날 가능성이 커졌는데, 그 미래에 대한 예측은 이미 지난 정권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위대함과 한계

대한민국 국민의 힘은 위대하다. 가까운 과거의 역사를 보자. 조국의 독립은 왕족이나 귀족이 도모해서 이룬 게 아니다.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핏값으로 이룩한 것이다. 국가가 망하면 왕족과 귀족이 기득권을 잃어서 가장 아쉬워하고 분노해서 독립투사로 나설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어쨌든 그들은 일반 서민과 다르게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몰락한 귀족도 있고 망한 국가를 살리겠다고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애쓴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독립투사는 그들과 거리가 멀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독립 이후 이승만 하야, 박정희 몰락, 군부정권의 해체는 국민의 위대한 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국민의 위대한 힘으로 애써서 쟁취한 결과물을 소수 패거리 집단이 탈취한 커다란 오점도 있었으나 대한민국의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서 정권을 바꾸는 데까지는 항상 성공했다.

하지만 새롭게 집권한 세력이 무너진 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독재에 지친 국민이 원한 건 일단, 투표권이었을 것이다. 내 손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다는 기본권리를 일단 되찾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도장 찍고 있는 선거 용지에 빼곡이 적힌 이름들을 본다면, 후보자들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국민은 큰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으로 이어졌던 때와 비슷해서 기시감마저 느낄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중은 윤석열 패거리 집단의 몰락을 보면서 박수할 것이다. 그러나 박수 소리가 채 사라지기 전에 ‘똑같잖아!’라고 하며 탄식할 것이다. 그러면서,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중우(衆愚)’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여기까지 국민이 떠올릴 수 있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치는 발전할 것이다.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니까.

◆문학적 상상력을 현실화 하자: 국민이 답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루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권력구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방법은 투표를 거부하는 것이다. 무조건 투표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선출할 인물이 없다면, 투표를 거부하는 게 유권자의 권리라는 의미다.

선거철만 되면, 투표행위를 독려하기 위해서 각종 매체와 거리 현수막에 투표는 유권자의 소중한 권리라고 선전한다. 그래서 투표하는 게 권리 행사라고 세뇌시킨다. 물론, 선출할 사람이 있다면, 유권자 개인이 선호하는 인물이 후보로 나왔다면 투표하는 게 맞다.

그러나 만약, 뽑고 싶은 사람이 없다면? 투표를 거부하는 게 유권자의 권리이다. 악(惡)이 싫어서 차악을 선택하는 건, 그냥 악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 소설에서는 투표율이 채 10%가 되지 않았다. 당황한 정부는 한 번 더 투표를 실시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부는 새벽에 도시를 버리고 탈출한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율이 10% 미만이 나온 국가는 없었다. 다수 득표자가 당선되는 구조라고 하더라도, 전체 투표율이 30% 미만 수준이라면 당선자의 권력 행사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이 열린다. 현재 양당 체제가 아닌 제3의 세력, 제4의 세력이 등장해서 정치 스펙트럼이 넓어질 것이다.

물론, 투표 거부 이전에 선거구 제도의 개혁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선거구를 바꿀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까지 선거구 개혁과 관련한 논의가 여러 번 있었으나,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니, 유권자의 실망과 바람을 투표 거부권으로 표시해야 한다. 투표율의 저하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확대해석하고 선전하려고 할 테지만, 투표율 저하야말로 역으로 유권자들에게 정치 선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2025년 대한민국 국민은 얼마 전에 봤던, 유사한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를 보기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선거에서 투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혁이 어려우면 혁명이 답이 될 수도 있다. 투표 거부권을 행사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대한민국의 정치 스펙트럼은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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