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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14)] 메이지신궁으로 돌아보는 일본의 근대⑩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승인 2019.04.13 10:00 의견 0

문명개화 사상은 계몽주의였다. 막부 말기 ‘난학(네델란드)’을 공부한 지식인들은 영국과 프랑스에도 눈을 돌렸다. 1873년에 설립된 학술단체 ‘명육사(明六社)’가 선도적 역할을 했다. 후쿠자와 유기치 등 계몽사상가가 활개를 폈다.

셋째로 식산흥업이다. 1870년에 공부성이 설치되고 1873년에 내무성이 설치되었다. 공부성은 이토 히로부미, 내무성은 오쿠보 도시미치가 장관이었다. 특히 정한론 정변 이후 정권을 장악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영국의 산업화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그는 1874년에 ‘식산흥업 백서’를 발간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했다.

정부는 에도막부와 각 번이 경영하던 광산, 공장, 탄광을 인수하여 관영으로 운영하였다. 특히 군수산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포와 포탄을 만드는 도쿄 포병공창, 오사카 포병공창, 그리고 엔진과 군함을 만드는 요코스카 해군 공창과 나가사키 해군조병창을 중점 육성했다.

한편 관영공장은 1884년부터 순차적으로 민간에 불하되었다. 관영공장의 민간 불하는 정경유착을 가져왔고 민간 기업의 발달을 촉진했다. 1883년에 설립된 오사카 방적이 대표적이었다.

해운업 분야에서는 1870년에 설립된 미쓰비시 상사가 두각을 나타냈다.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침략 때 일본군을 수송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미쓰비시, 미쓰이같은 정상(政商)들은 특혜를 받아 성장했는데 정경유착의 폐해도 심했다.

눈여겨볼 점은 일본의 근대화는 처음에는 서양화로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패를 참고삼아 고치는 과정을 거쳐 일본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또 한 가지는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것 같지만 저항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정부 정책에 소외된 사족이나 농민층의 불만이 컸다. 이들은 암살 등 무력 행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군제 개혁을 한 병부차관 오무라 마스지로가 1869년 9월에 살해된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농민반란도 1873년에 63건이나 일어났고 1877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서남전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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