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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농협개혁 시각에서 본 농협 - "농협은 어떤 조직인가?"

주동식 객원편집위원 승인 2015.01.27 16:08 | 최종 수정 2019.07.04 02:42 의견 0

농협 개혁이 본격 거론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과 권위주의 정권의 퇴장과 시기를 같이한다. 농협 역시 조합장 직선제의 실현과 함께 농협 상층 구조의 형식적 변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 아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질서,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전히 지역 조합과 조합원들을 지배하는 질서는 시급한 개혁 대상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이다.우리나라 농협의 출발점은 1907년 만들어진 지방금융조합이다. 독일의 라이프하이젠을 모델로 일본의 고문이 와서 만든 작품이었다. 이후 조합은 군 단위까지 뻗어나가며 전국 조직으로 발전해 연합회까지 만들었다. 오늘날 서대문 농협중앙회 건물이 당시 연합회 건물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우리나라 농협의 뿌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금융조합만이 아니라 식산계라는 이름의 식산조합도 나타났다. 이 두 개 조직이 결합한 것이 현재 농협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만들어내는 신경(신용+경제) 통합 구조의 뿌리이다. 즉, 금융조합이 대부 등 신용 사업을, 식산조합이 농산물 판매 등 경제 사업을 하는 구조였고, 양자가 상호 도움을 주는 형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식산조합은 폐쇄되고 그 조직이 조선농회에 연결되어 계속 전국조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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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농협의 계통조직 쳬계 (출처: 농협 홈페이지)

 

¶ 일제 때까지 올라가는 신경분리의 갈등

 

해방이 되고 1948년 정부가 출범하면서 금융조합이 정부 어느 부처에 귀속될 것인지가 이슈로 떠올랐다. 농림부냐 재무부냐를 놓고 10여년의 분쟁이 이어졌다. 이 문제 역시 농협의 신용 기능을 그냥 금융사업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농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수단으로 볼 것이냐의 관점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결국 1957년 금융조합은 재무부로, 식산조합은 농림부로 귀속한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지리한 싸움은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종결이 아니라 문제의 잠복에 불과했다.이후 식산조합은 농업협동조합으로, 금융조합은 농업은행으로 변신했다. 두 조직의 성립을 규정하는 법도 농업은행법과 농업협동조합법으로 각각 기능하게 됐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정적으로 식산조합에는 농촌과 농민을 지원할 자금이 없었다. 농업은행에서 돈을 차입해야 하지만 농업은행은 여기에 관심이 없었다. 금융기관인 농업은행은 금융의 논리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5.16이 터졌다.5.16 주체세력은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혁명 1호 사업으로 내걸었다. 그만큼 당시 우리 농촌의 상황이 피폐하고 열악했다. 고리채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농업은행의 기능이 필요했고 결국 식산조합과 농업은행은 다시 통폐합의 과정을 밟게 됐다. 농업은행은 상법상 은행의 성격이었지만 통합하면서 간판은 농협으로 내걸었다. 겉은 협동조합, 실제 조직과 운영은 은행이라는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더욱 심각한 문제는 농협 안에 일제시대 농촌 지도조직에서 일하던 인력들이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는 점이었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내가 만든 조직이 아니다, 내 협동조합이 아니다”는 인식이 조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조합이 성립하려면 조합원들이 출자금을 내야 하지만 우리 농협에서는 그걸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정부는 농민들을 농협에 강제 가입시키고 조합비도 강제 징수해야 했다. 그 방식은 추곡 수매 대금을 지급하면서 조합비를 강제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농협 내·외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한국의 정치 질서에서 농민은 통제의 대상이었고, 그러한 통제의 수단으로서 농협은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었다. 농협은 정부의 농촌 정책사업의 대행기관 역할을 하면서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강화해갔다. 그 과정에서 돈과 권력이라는 떡고물이 따라왔다. 1962년에는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농협중앙회장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지역조합장은 해당 시장·군수의 추천을 받아 국가가 임명하는 체제를 도입했다. 농협이 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는 관제조직화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1989년까지 4반세기 넘게 유지됐다.이런 구조에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1970년대부터 도시에서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졌다면 농촌에서는 농협민주화운동이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변혁세력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면서도 이를 사회 기층의 변혁으로 연결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1989년 농협직선제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지방자치선거보다 앞선 성과였지만 농협의 관치조합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했다. 민주적 자주농협을 만드는 실천적인 로드맵이 없었던 것이다.조합장을 직선으로 뽑게 됐지만 나머지는 과거와 똑같은 협동조합이었다. 직원들의 관료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합장 직선제라는 외형에만 집중하고 농협 조직의 본질적 민주화 노력에 소홀했던 결과였다. 결국 농협 조직의 운영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병폐를 고스란히 온존 확산하게 됐다. 민주적 훈련이 부족한 농민들은 주인의식이 부족했고 협동조합 민주화의 과제는 고스란히 남아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막대한 재정투입 결과물이 ‘괴물 농협’

 

김영삼정부 시절 UR로 어려움을 겪게 된 농업인을 돕고 농업농촌발전을 위해 ‘농어촌특별세(농특세)’를 신설, 특별재원을 마련하고 5년간 50조원 가까운 재정을 투입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정부도 각각 40조~50조원의 재정을 지원했다. 20여년간 200조원에 달하는 재정지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결과는 농업의 경쟁력 강화나 농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아니라 600조원이 넘는 자본을 운용하는 거대 농협이라는 사업집단이었다. 막대한 재정투자 지원의 최대 수혜자이자 그 결과물이 바로 ‘괴물 농협’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지금까지의 역사나 자금 조성 내용 등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농협은 농업인 모두의 자산이며 동시에 국가적 자산이다. 하지만 농협을 이끄는 농협중앙회장과 지역조합장들은 자율을 앞세워 오히려 농협을 자신들과 임직원의 이익에 봉사하는 금융기관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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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중앙회 조직도 (출처: 농협 홈페이지)

 

농협 개혁의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인 신경분리(신용-경제사업 분리)만 봐도 정치논리나 외풍에 의해 그 성격이나 실행전략이 갈짓자 걸음을 걸었다는 지적이다. 노무현정부 당시인 2007년에 “앞으로 10년 후 평가해서 검토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농협 로비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특히 정대근 당시 중앙회장은 노무현 정부의 ‘빅브라더’로 불릴 만큼 농협 내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농림수산부 인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얘기도 있다.경남 삼랑진 농협 조합장이던 정대근이 김해농협에 근무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친인척에게 인사 등 특혜를 베풀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대근 부부를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면서 정대근은 ‘황제 회장’의 위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농협의 자회사인 남해화학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회사를 만들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넘겼다는 얘기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한 결정적인 요인이 박연차 회장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본다면 사실 진정한 비극은 정대근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농협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대통령이 센지 농협이 센지 한번 해보자”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농협의 정치화는 노무현정권 시절에 본격화되었다는 평가가 많다.농협이 조합원인 농민이 아니라 농민들의 심부름꾼이자 대리인(agent)인 임직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은 해마다 국정감사에서 거론되는 단골 메뉴이다.2013년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이운룡 의원은 “농가 평균 소득이 3,130만원인데 농협에는 연봉 1억원 넘는 직원만 2,569명”이라고 지적했다. 2012년에는 1만8,843명 전 직원에게 스마트폰 기기를 구입하도록 196억원을 지원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샀다는 증빙만 내면 구입 및 통신비로 1인당 96만원씩 월급 통장으로 입금했다는 것이다.농협의 급여 대비 복리후생비 비율이 30%로, 4대 국책은행과 특수은행 가운데 최고라는 지적도 나왔다. 직원에게 주택구매자금을 빌려줄 때 이자를 2.87%씩 보전해주기도 했다. 2012년까지 6년간 학자금(초·중·고·대학 등록금 전액) 지원에만 1,635억원을 사용했다. 취학 전 자녀에 대해 월 13만원씩 187억원을 줬고, 해외 유학 중인 직원 자녀에게도 38억원을 학비로 지원했다. 같은 기간 6년 동안 농가에 대한 장학금 지원은 210억원에 불과했다. 농협은 2012년에 직원 452명의 명예퇴직금으로 738억원, 1인당 1억6,322만원을 지급했다는 지적도 나왔다.농협중앙회 임직원 평균 연봉은 7천만원을 넘으며 연봉 1억원 이상인 직원도 2천명이 넘어 전체 직원의 12.2%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3급 팀장만 되면 평균 연봉이 1억원 이상이라는 것이다.

 

¶ 연봉은 쎈데 경영성적은 최하위

 

하지만 농협의 경영 성적표는 최하위권이라는 평가이다. 농협은행의 부동산 PF 대출 2조8,313억원 중 3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 대출이 44%인 1조2,462억원이었다. 은행권 평균 부실률 13%와 대조적이다. 농가인구는 1980년 1,082만명에서 2013년 283만명으로 줄어들었으나 이 기간 농협 임직원은 3만7,511명에서 8만2,208명으로 늘어난 것이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다.시장과 군수를 ‘지방행정의 장’이라고 한다면 조합장은 ‘지방경제의 장’이다. 그만큼 농축수협과 산림조합은 우리나라 농어촌 지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독과점적 금산복합체다. 지역농협의 조합 당 평균 경제사업 규모가 연간 291억 원 정도이며, 지역농협 전체가 운용하는 상호금융의 예수금과 대출금의 평잔을 합하면 약 290조 원이다. 지역농협이 연간 운용하는 총자산은 조합 당 약 244억 원이다. 농협중앙회는 연간 300조 원의 자산을 별도 운용하고 있다.농협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직원 급여에 대한 비판의 경우 “결국 임직원의 급여를 결정하는 것은 조합원의 뜻이고 이 문제에 직접 당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이 왈가왈부하는 게 적절한가”라는 반론도 있다. 물론 농협에 막대한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반박이 뒤따른다. 다만 IMF 당시 일반 시중은행들이 넘어지고 공적자금을 지원받을 때 농협은 공적자금 지원 없이 위기를 넘긴 유일한 민족은행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정부로부터 혜택도 받지만 정부 사업을 수행하는 데 따른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추곡수매 사업이다. 정부가 공공비축미 물량을 대폭 줄이면서 추곡 소매의 90% 이상을 농협이 감당하고 있다. 농협이 해마다 짊어지는 추곡수매 부담은 몇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지나치게 높다는 비판이 많은 대출금리 역시 시중은행처럼 CD나 금융채를 발행할 수 없는 입장에서 예금이나 차입이 주된 자금 조달 수단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아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해서 발생한 초과 이윤도 추곡 수매, 농산물 수매, 각종 보조금 지원과 지도사업 등 경제사업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메우는 데 쓰인다고 설명한다.임직원들의 급여 역시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7년째 동결중이라는 얘기도 있다. 물론 이것은 각종 수당 등 혜택을 제외한 것이기는 하다. 조합원인 농민들이 받는 배당 역시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배당률이 무척 높다는 반박도 있다. 사업준비금까지 포함하면 배당률은 더 높아지며 5년 안에 출자금을 넘어설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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