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독일 통일(45)] 분단시대의 동서독 교류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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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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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에 동·서독 간의 인적교류는 방문과 이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동독주민의 서독 방문은 1961년 8월 12일 베를린 장벽 설치 시까지는 비교적 활발하였으나 장벽 설치 후 격감하였다. 1964년 9월 9일 동독이 서독 방문을 대폭 확대 허용하는 시행령을 발표하였다.
“연금수령자(정년 퇴직자, 산재연금수령자, 장애연금수령자)에 한하여 연간 4주간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였다. 이때부터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연금수령자들이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하였다. 이후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발효로 꾸준히 증가하여 1980년에 150만 명, 1986년에 200만 명을 돌파하였다. 반면 서독 주민의 동독 및 동베를린 방문은 분단시대에는 기록에 없다가 기본조약이 서명된 197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분단시대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일방적 이주만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1962년 이전에는 불법적 이주만 있었다.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전까지 대략 약 310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매년 12만 명 내지 33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에는 목숨을 건 불법이주와 1962년 이후 동독 당국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 이주로 나누어진다. 불법적 이주의 경우 1천 명 이상이 탈주 중 목숨을 잃었지만 매년 이주자 수는 1966년 이후 1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합법적 이주는 1962년 4624명에서 시작하여 점차 늘면서 대체로 1만 명 전후를 기록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정치범 석방을 위한 거래를 통한 이주로 1963년 8명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증가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 매년 1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서독 정부는 외환이나 물품을 동독에 지급한 대가로 동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자유롭게 이주시켰다. 이를 정치범 석방을 위한 거래(Häftlingfreikauf. Freikauf)라고 불렀다. 이는 아데나워 총리 집권 시기인 1963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안별로 시행하다가 점차 조직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63년부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이 사업으로 총 34억4천만DM가 동독에 지급되었다. 이 사업 초기에는 평균적으로 1인당 약 4만 DM이었으며, 고학력일수록 금액은 커졌다. 콜 총리 시절인 1982년에 1인당 9만5700 DM이었고 가족 재결합의 경우에는 10만 DM이었다.
서독 정부가 이런 일종의 인신매매에 직접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또한 외환을 동독에 직접 지급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 물자지원 실무는 슈투가르트에 소재한 독일 신교연합회(Evangelische Kirche in DFeutschland) 산하 사회구호복지기구인 Diakonie가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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