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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주년(2)] 4·19는 혁명인가?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4.26 04:20 | 최종 수정 2020.05.10 21:09 의견 0

◇ 4·19와 촛불

4·19와 촛불은 유사한 점이 있다. 둘 다 시민사회의 힘이 정치권력을 전복시켰다. 다음으로 우연히 제1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우연히도 둘 다 민주당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본질면에서는 다르다.

첫째, 야당의 경험이다. 전자는 체제를 유지할 힘이 없었던 무능한 정치 세력이었다면, 후자는 두 번의 집권 경험을 토대로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바람을 제대로 수용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둘째, 4·19가 있던 당시의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성숙한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 현재는 이 모든 부분에서 괄목상대(刮目相對)했다고 할 만큼 성장한 상태이다.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 시절의 야당은 견제 세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민이 일어섰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선전했으나, 물리력을 앞세워 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정권을 지키려 했던 이승만의 ‘가부장적 독재’ 체제는 4월 19일을 기점으로 하야한 4월 26일까지 일주일로 충분했다.

이승만의 하야로 제1야당인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리라 기대했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봄바람에 어느 분야 하나 당시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알다시피 이후에는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 세력의 전투화에 짓밟혀 어렵게 찾은 권리를 채 행사해 보기도 전에 수십 년의 군부독재 암흑기로 접어든다.

이윽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길고 길었던 한국 민주주의의 겨울에 봄기운이 돌았고 딱딱하게 언 대지를 뚫고 민주주의 싹이 나오게 되면서 4·19를 혁명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그전까지는 5·16 세력에 의해 평가 절하돼 ‘4·19’의거라고 불렸지만, 그 지위가 ‘혁명’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2020년으로 4·19는 60주년을 맞이했다. 기존의 다른 정부와 비교할 때 현 정부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현 정부는 ‘촛불’로 정권을 획득했고, 전 정부를 청산해야 할 ‘적폐’로 규정했다. 즉, 자신의 권력을 정의함에 있어서 국민의 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이며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독야청청’한 정권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국민들은 채 가시지 않은 헌정 역사상 초유의 탄핵여운 속에 여당을 압도적으로 밀어줬다. 그러나 이후 경제, 사회, 정치, 통일 등 정책 추진의 부침(浮沈)과 미숙함이 드러났다. 특히 ‘코로나19’ 대처상황 속에서 보인 여당 관계자들의 부적절한 정치적 발언은 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고 개중에는 지지를 철회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제21대 총선은 보수세력인 야당이 역전의 기회를 얻을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예측도 나타났다.

그러나 결과는 또 한 번의 여당 압승이었다. 국회 의석의 60%를 차지하면서 거대 공룡 정당으로 등장했다. 총선에서 압승한 여당은 2번에 걸친 우연의 승리를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해석하고 더더욱 자가당착(自家撞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날 선 칼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됐다.

◇ 4·19 명칭에 대한 논쟁: 4·19는 혁명인가?

지금까지 글의 서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 부르는 4·19와 촛불에서 의도적으로 ‘혁명’이라는 단어를 빼고 언급했다. 우선 이 사건들이 혁명의 요건에 해당하는가 질문을 던져보자.

어떤 사건과 상황에 대한 입장은 관점에 따라 다르다. 정치적 색깔을 따라 구분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진보세력들이 이승만의 독재와 하야만을 기억에 간직하고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수감만을 기억하는 반면, 극보수는 이승만의 위대함을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박근혜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천만 서명을 진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명확한 단어로 어떤 사건을 정의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사건의 전제조건을 명확히 따져서 정리해야 하며, 진영 논리와 감상에 빠져서 폄하(貶下)거나 무조건 예찬(禮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 4·19는 ‘혁명’으로 불리운다. 필자도 이 말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혁명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좀 더 냉철하게 따져볼 필요는 있다. 특히, 현 정부가 ‘촛불’을 ‘혁명’으로 바라보면서 4·19와 동치(同値)해 정권의 정당성을 챙기고 있기에 “4·19는 혁명인가?”라는 질문은 ‘촛불’을 논함에 있어서, 그리고 거대 여당이 앞으로 이끌어 나갈 항해에 ‘방향키’로 작용할 수도 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4·19의거’라고 불렀다. ‘의거(義擧)’는 ‘의로운 거사’라는 뜻인데, 당시 5·16 쿠데타 세력은 그들의 범법행위를 ‘혁명’으로 칭했기에 4·19를 인정하면, 5·16을 불법적인 쿠데타라 자인하는 꼴이었다. 따라서 4·19를 혁명으로 칭하는 데 부담을 가졌다.

이와는 반대로 4·19의 의미를 중시하는 쪽에서는 ‘혁명’으로 부른다. 과거 김영삼 정부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을 펼치면서 4·19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물론 김영삼 정부를 진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김영삼의 과거 정치적 행보를 추적해 볼 때, 그는 군부독재에 대항한 투사라는 캐릭터가 강했다. 따라서 5·16이 쿠데타라고 바로잡으면서 4·19를 ‘혁명’으로 인정한 것이다.

진영의 논리를 벗어나 학술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김영명 교수는 저서 <한국의 정치변동>에서 4·19를 ‘봉기’라는 명칭으로 표현한다. “민중이 집권세력에 대해 ‘들고 일어났다’는 의미에서 ‘봉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라고 주장했다. 단, “학문적 입장이 아니라면 상징적이거나 실천적인 의미에서 4·19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주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하고자 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여 혹시 모를 비판과 비난을 피해가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명칭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혁명’이라는 명칭은 바뀌지 않을지라도 그 의미에 대한 지적과 동의하지 않는 웅성거림은 계속될 것이다.

◇4·19의 한계

여기서 ‘혁명’의 정의를 살펴보자. (*참조:네이버 국어사전)

1.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2.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3.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이 말을 보다 쉽게 바꾸면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4·19를 해석하면, 정권이나 정치사회의 수준에서 보면 권위주의 일인 체제(이승만)를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에 4·19는 혁명이라 볼 수 있다. 정권이 바뀌었고 헌법도 개정됐다. 겉으로 볼 때 혁명이라 할 만하다.

4·19는 분명, 이승만 독재를 타도하고 한국에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힘으로 집권자를 교체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의 DNA가 우리 국민에게 있기에 이후 독재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주화)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게 했고 ‘촛불’로 초유의 탄핵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의문이 생긴다. 이승만 정권이 외견상 법과 제도 측면에서 반민주적이었는가? 이승만도 민주적 정치 절차에 따라 자신의 체제를 유지했다. 즉, 형식적인 차원에서는 민주주의를 고수하려 했고, 그 스스로 민주주의를 거둘 수 없었다. 단, 실질적 적용에서의 문제가 있었다.

따져보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고 해서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4·19 주도 세력은 이승만 하야 전이나 후나, 체제 전복과 신체제 건설을 위한 사회혁명, 혹은 정치혁명을 시도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이념적 토대도, 조직적 기반도 없었으며, 정치적 지도세력도 없었다.”  김영명 <한국의 정치변동> 중

요컨대, 4·19는 당시 한국의 근본적인 정치 구조의 변혁을 이루지 못했고, 시도하지도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다음으로 기성세대가 아닌 학생이 주도했다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당시 대학생은 서구의 진보적인 사상들을 선진적으로 받아들인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러한 배움을 실천하려는 열정이 선봉으로 서게 된 원동력이었겠지만, 그들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들의 봉기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던 것이지 애당초 정부를 쓰러뜨리려는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권력과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없었다.

이후 민주당 정권이 수립됐으나 그들은 이승만 정권 붕괴 후 발생한 권력의 공백을 메우지도 못했고, 정치 과정을 주도하고 민주개혁을 이루며 동시에 드높아진 사회·정치적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주도 세력 무능한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 또 다른 퇴진을 요구하지도 못했던 또 다른 구조적 한계도 있었다.

◇ 4·19는 혁명인가?

김영명 교수는 앞의 책에서 “4월 봉기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봉기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독재와 부패에 ‘반대한’ 봉기였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중략) 당시의 상황은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라고 말한다.

감정적으로는 ‘혁명’이라 느껴지고 그렇게 부르고 싶다 하더라도 따져보면 혁명은 아니라는 것이 학문적 접근이다.

그러나 4·19는 운동 차원에서는 대한민국에 ‘혁명’의 DNA를 심어준 역사적 사건이다. 진보는 극대화하고, 보수는 폄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4·19의 정통성은 공유된 상황이기도 하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4·19가 갖는 혁명의 DNA와 의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ORNFsHIrs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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