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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9주년(3)] 피로 이뤄낸 민주주의 4.19혁명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4.23 09:12 | 최종 수정 2020.04.19 22:17 의견 0

¶ 4월 18일 고려대 시위, 4.19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다

지방도시에서도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해서 발생했습니다. 경찰과 자유당의 탄압에 가까운 시위대 방어는 계속 문제를 일으켰죠. 그런데 4월 11일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는 스스로 경각심을 갖기는커녕 자신의 행위에 반하는 자는 반역자라는 식의 태도로 돌변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4월 15일에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되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시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이야기했죠.

▲ 4.18 고대 시위. 고대생들이 국회에 진출하여 요구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 사월혁명회


이승만의 담화는 시민을 향한 일종의 협박과 경고였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행동하게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담은 것이죠. 이에 시민과 학생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시위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명이 국회의사당에서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평화행진을 하며 귀교하던 중 종로4가에서 대한반공청년단 등 폭력배들로부터 피습을 당해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시민과 학생들을 탄압하고,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완전히 지지를 잃고 말죠.

¶ 4월 19일,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다

이에 4월 19일, 서울 시내 대학의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여기에 일반시민과 중고등학생들도 가세했습니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에서 경무대로 진격하며 이승만과의 면담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도 같이 요구했습니다.

▲ 4.19 오전에 경무대에 진출한 청년 학생들이 경찰과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이 직후에 발포가 시작되어 이날 124명이 사망, 558명이 부상했다. ⓒ 사월혁명회


그러나 경찰은 시위대의 요구를 무시하고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사상자가 생기고, 군중은 더욱 흥분했습니다. 시위는 곧 폭동으로 변했습니다. 일부 시위대는 자유당에 조종당하던 언론인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본부, 자유당 본부 등을 습격했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습니다. 오후 3시를 기점으로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주둔시켰습니다. 서울에서만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시위는 서울에서 그치지 않고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퍼져나가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계엄군이 등장하면서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한 시위는 다시 계속 이어졌습니다.

▲ 4.19 혁명 당시 시위대의 모습 ⓒ 위키백과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기붕을 설득해 내각을 퇴임하는 데에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시민들은 다시 분노를 느꼈습니다. 자신의 권력은 계속 지니고 가겠다는 태도만 고집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시민들은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 4월 26일 국회에 사임서 제출하다

4월 25일에는 또 다른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전국의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 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행진시위를 진행했던 것입니다.

▲ 4.25. 마침내 대학교수 258명이 시위에 나서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다음날 시민 학생 10만명이 서울 시내를 점령,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 사월혁명회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3.15 부정선거와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과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죠. 교수들의 시위는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민들도 대학 교수들의 행진에 자극받아 야간시위를 벌이며 자유당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에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에게 시위대에 대한 발포 중지를 명령합니다. 이후 학생과 시민대표와의 대화를 통해서 국민이 원하면 하야하겠다는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오전 11시에 이승만은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합니다. 4월 28일 이기붕은 가족들과 함께 자살했으며, 이승만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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