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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배우들이 몸으로 연기하는 현대인의 무거운 삶의 무게 - 연극 '스프레이'

김혜령 기자 승인 2017.12.28 18:22 의견 0
백화점 구두 판매원으로 혼자 살아가는 주인공. 만원 지옥철로 출퇴근을 반복하고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집에서 스마트폰을 켜두고 밥을 먹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주문한 물건을 택배로 받는 것. 택배는 주인공의 작은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세상과의 연결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보여주는 유일한 것이다.

 

그런 그를 밤마다 괴롭히는 소리가 있으니 바로 고양이 소리다. 주인공은 고양이 소리에 매일 밤 잠을 설치며 괴로워한다.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어 잠을 자지 못한다 항의해도 옆집 여자는 자신의 고양이가 그럴 리 없다고 이야기한다.

 

스프레이의 주인공은 백화점에서 구두를 파는 판매원으로 등장한다. <p class=(극단초인 제공)" width="550" height="367" /> 스프레이의 주인공은 백화점에서 구두를 파는 판매원으로 등장한다. (극단초인 제공)

잠이 부족한 주인공은 택배를 찾아오다 착오를 일으킨다. 자신의 것이 아닌 이웃 109호 택배를 받아온 것이다. 109호의 택배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매니큐어와 겨드랑이 냄새 제거용 스프레이였다. 그날 이후 남자주인공에게는 다른 집 택배를 훔치는 도벽이 생기고, 날이 갈수록 그의 범행은 점점 대범해진다. 어느 날 고양이가 울던 옆집 여자 이름의 택배를 훔치게 되는데, 택배상자 속 내용물은 다름 아닌 고양이 시체였다.

 

여기까지가 연극 ‘스프레이’의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며 본격적인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극은 중반을 넘어서 마지막까지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풍기며 기괴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마지막은 옆집 여자가 자살한 모습을 주인공이 목격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인공의 삶이 흘러가는 모습으로 극을 끝맺는다.

 

사실 소음공해로 인한 살인, 폭행의 이야기는 뉴스에서도 자주 다뤄졌던 이야기이다. 현대인의 고독, 자살, 고독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연극 ‘스프레이’는 뉴스에 흔하게 등장해 쉽게 흘려 넘기던 문제를 정면으로 조우하게 만들고 이를 줌-인해 들어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세밀하게 목격하게 만든다.

 

 

처음 잘못 들고 온 택배상자안에는 여성의 매니큐어와 겨드랑이 냄새 제거 스프레이가 들어있었다. <p class=(극단초인 제공)" width="550" height="367" /> 처음 잘못 들고 온 택배상자안에는 여성의 매니큐어와 겨드랑이 냄새 제거 스프레이가 들어있었다. (극단초인 제공)

 

극의 진행에 따라 드러나는 주인공은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다. 남들에게 밝히지 않지만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로 고통받는 인물이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감정의 트라우마가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축축한 자신의 손 때문에 첫사랑을 잃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극이 전개되며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주인공의 도벽, 옆집 여인의 자살, 고양이가 담긴 상자가 배달되는 일을 막기 위해 택배원을 계단에서 밀어 살해하는 일-은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우연처럼 시작된 나쁜 일을 감추고 막으려다보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설정은 심도 있는 고민을 자아낸다.

 

박정의 연출은 대사보다 움직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주인공은 극 속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대신 내레이션에 맞춰 몸으로 연기한다. 이는 다른 배우들의 정교한 몸짓을 통해 배가된다. 대표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극 중반에 벌어지는 백화점 퍼포먼스다.

 

연극 '스프레이'는 연극보다는 행위예술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p class=(극단초인 제공)" width="550" height="367" /> 연극 '스프레이'는 연극보다는 행위예술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극단초인 제공)

 

파티션 벽을 다리로 쓸어내린다거나, 다리만 등장해 구두를 신어본다거나 하는 동작으로 백화점에 온 손님에게 구두를 판매하는 과정을 무대 위의 서사로 풀어낸다. 한편 신체 중 다리만을 이용해 표현함으로써 허영심과 성적욕망에 가득찬 인간의 모습을 상징화하고 희화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심리묘사를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는 연극 ‘스프레이’는 행위예술이라는 예술장르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무대와 공간활용도 인상적이다. 배우들이 극중 소품으로도 활용되는 파티션을 끊임없이 움직여 공간의 변화를 주었다. 배우들과 파티션이 만들어낸 공간은 문이 되기도 하고, 주인공의 방이 되기도 하며 연극 무대에 상상력과 역동성을 불러일으켰다.

 

적절한 효과음과 영상의 활용 역시 이 연극의 맛을 살려주는 장치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옆집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맞춘 고양이 움직임을 표현해낸다거나, 주인공의 상상이 펼쳐지는 대목에서 가위손이 된 주인공의 모습의 모습이 영상으로 대체되는 하는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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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시간 90분 정도의 짧은 극이지만, 2시간 넘는 극을 본 마냥 묵직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비밀스런 어두운 모습이 모두 합쳐져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 속에 보여지는 소외, 고독, 우울, 비난, 왕따, 스트레스 등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공연 내내 묘한 감정적 공감과 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혀 관극을 포기하고 달아나고 싶을 정도였다.

 

연극 ‘스프레이’는 극단 초인의 작품으로 김경욱 원작, 박정의 연출, 2016년 12월에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서 초연을 거친 후 1년만에 재공연에 나선 작품이다. 주연 이상희는 최근 개봉한 독립영화 ‘련희와 연희’의 ‘련희’역으로도 호연했다. 대학로 ‘예술극장 오르다’에서 31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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