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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7)] 정도전, 무학대사 경복궁의 자리를 두고 다투다

시사-N 승인 2018.02.14 13:15 의견 0
야사에 따르면 풍수지리의 대가 무학대사가 친구였던 태조 이성계의 부탁을 받고 도읍이 될 땅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다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마침 조선을 세우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정도전도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이 도읍으로 적당하다”고 태조 임금에게 건의해 새 도읍으로 한양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궁궐터를 정하던 중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부딪힙니다. 무학대사는 남쪽의 관악산에서 화기(火氣: 불기운)가 많으니 궁궐을 지을 때 동쪽을 향해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중국의 궁궐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동쪽을 향해 궁궐을 지어야 하느냐며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결국 정도전의 말에 따라 지금 위치에 경복궁이 지어졌습니다. 대신 관악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 경복궁곳곳에 화재를 다스리기 위한 장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일까요 이후 경복궁은 잦은 화재와 많은 피해를 겪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가 “그럼 남경 한양은 어떠한가”라고 무학에게 이야기하니 “나쁘지 않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사와는 달리 정사에서는 태조 이성계 의중으로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단양군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조선이 개국하고 지금의 계룡시가 있는 곳과 한양(서울)이 도읍의 물망에 올랐습니다. 천혜의 군사요충지인 계룡시를 놔두고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이유는 한강이 있어서입니다.

 

한강은 농업과 식수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땅의 70%가 산지라 세금을 쉽고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서는 강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조선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강을 낀 한양의 지리적 요건 덕이었습니다.

 

목조건물이 이어지는 구조로 된 궁궐은 화재에 취약한 곳이라 궁궐에서 일어난 화재기록은 역사기록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경복궁은 화재로 인한 피해가 컸습니다.

 

화재 예방을 위한 대표적인 장치로 근정전 앞에 있는 드무를 둘 수 있습니다. 드무는 커다란 청동그릇에 물을 담은 것인데, 방화수를 비치하기 위한 용도이지만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놀라 달아난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tip:드무를 찾아 사진으로 담아보아요.

 

[이재권 / 한누리역사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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