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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26)] 그냥 갈 수 없잖아 (2)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2.26 11:31 의견 0
“아니야, 음식장사는 절대로 하지마. 그건 자네하고는 안 어울려.”정말 오랜만에 포장마차 <그냥갈수없잖아> 아줌마를 만났다.

 

대입시험을 치른 후 나는 처음으로 포장마차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커다랗게 들어서있는미아삼거리 정류장 뒷골목엔 20년 전엔 포장마차가 15개 정도 줄을 서 있었다.

 

“너 대학입시도 끝났으니 외삼촌이 술 한잔 사마.”

 

물론 술이야 친구들과 숨어서 부모님 몰래 마시긴 했지만술을 파는 정식 술집은 외삼촌 덕분에 처음가게 된 것이다.교복을 입고 머리가 짧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반 술집에 가면 금방 탄로나기 마련이었다.물론 요즘 아이들은 대 놓고 술집에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하지만 말이다.

 

그때는 위, 아래 개념이 그나마 정확했던 시절이었다.골목에 숨어서 담배 피던 학생들도 어른이 오면 담배를 숨기고 도망가거나 하던 때였다. 요즘엔 정말 무개념의 시대가 된 것 같아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설하고, 아무튼 외삼촌께 소개를 받은 후 나는 하루를 멀다 하고 이 포장마차를 즐겨 찾았다. 그때는 꼼장어가 제일 만만한 포장마차 안주였다.꼼장어, 참새구이, 오돌뼈, 병어회, 닭발, 오뎅 국물, 왜 그리 모든 게 맛있었는지.안주는 대부분 1천5백 원 정도였고 당시 포장마차 소주 값은 5백 원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병어회를 좋아하는 나는 깻잎에 싸서 뼈 채 오도독 씹어 먹는 그 맛을 무지 좋아했다.<그냥갈수없잖아>는 10개 이상의 포장 마차가 길게 늘어선 그 골목에서도 단연 인기가 최고였다.멀리 의정부에서도 단골집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나랑 마찬가지로 병어회를 좋아하는 보문동에 사는 고종사촌 형도 일주일에 한번씩은이 포장마차에서 병어회에 소주를 마시려고 미아리까지 놀러오곤 했다.

 

<그냥갈수없잖아>는 주인아줌마가 만든 규칙이 두 개가 있다. 규칙 하나는다른 곳에서 술이 취해 오는 손님은 받질 않는 게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일인당 소주를 딱 한 병씩만 판다는 거다.아무리 오래된 단골이고 매상을 많이 올려줘도,그리고 제 아무리 두주불사라고 해도 한 명 당 각 일병의 판매규칙을 어겨본 적이 없다.

 

추억 하나가 또 사라진다. 미아삼거리에서 제일 오래된 2층 건물이 헐렸다. 방천시장사장 아들인 내 친구 상복이네 집인데아버지가 사위만 믿고 맡겼다가 탈탈 털린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사진: 이정환)

 

“아줌마, 손님 오셨어요”

 

연탄불로 음식을 만들던 당시엔 코를 자극하는 연탄 가스 냄새도 심했다.연탄 가스에 살짝 취해 졸고 있던 아줌마에게 손님이 온 걸 알리는 것도 손님들 몫이었다. 그리고 아줌마가 의자에 곤히 잠들어 꾸벅이고 있으면 손님들은자기가 먹은 음식값을 스스로 계산해서 아줌마의 고개 밑에 놓고 가곤 했다.손님들도 서로의 얼굴을 다 아는지라 혼자서 술 생각이 나서 찾아 오면 손님끼리 말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아줌마 제 여자 친구에요”“아 참 곱네. 안주 뭐 줄까”

 

여자 친구가 생기면 어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시키기 보단 이 포장마차 아줌마한테 먼저 보여주었다.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져 속상해 할 때도 이 포장마차에서 실연의 아픔을 달랬고아줌마는 내게 마치 어머니처럼 위로를 해줬다.

 

아주머니가 처음으로 각 일병 판매 규칙을 깨트린 것도 나 때문이었다.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입대 통지서를 급작스럽게 받은 나는 작별인사 차 포장마차에 갔다.

 

“아줌마 저 군대 가요.”“응 그런 말 없었잖아”“저도 당황스러워요. 아버님께서 제 군입대를 서두르셨나 봅니다.”

 

당시 서울지방병무청에 작은아버지가 근무를 하실 때였는데,2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는 게 제일 좋을 거라던 아버님이 작은아버지에게압력을 행사해서 입영 날짜를 급하게 받았던 거다.그 날 나는 아주머니와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주 서너 병씩은 마신 듯 했다.

 

제대 후에도 <그냥갈수없잖아>는 여전히 인기가 많은 포장마차였다.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 나의 빈자리는 내 친구들이 잘 메워줬던 모양이고언제 군대엘 다녀 왔냐는 듯이 나는 참새 방앗간처럼 그 포장마차를 들락거렸다.

 

그러다 1988년 88하계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의 대대적인 포장마차 단속 바람이 불면서 서울의 포장마차들이 순식간에 전부 사라졌다.그리고 아줌마도 동네에서 볼 수가 없었다.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아줌마를 우연히 만났다. 기백엄마와 동네 감자탕집에 소주 한잔 하는데 주방에서 나오는 아줌마가 바로 <그냥갈수없잖아>의 그 아줌마가 아닌가

 

“아줌마!”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다.“아니 이게 누구야 이게 얼마만이야. 반갑네. 장가는 갔지”“그럼요 애가 둘입니다.”“아들이야 딸이야”“네, 재주가 없어서 아들만 둘입니다.”“아이구 잘했네”“그럼 색시는 누구야 정화야 은정이야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람”옆에 있던 기백엄마가 말을 꺼낸다.“아줌마 저에요. 저 기억하세요 예전에 정환씨랑 포장마차에서 인사 드린 적이 있었는데요”내가 무안해서 한마디 꺼냈다.“하하하, 포장마차 없어지기 전에 데리고 가서 인사했던 그 아가씨에요.”“아 맞다. 기억 난다.” 진짜 기억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그 뒤로 나는 아줌마가 찬모로 일하는 감자탕집의 단골손님이 되었다.가끔 소줏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아줌마가 보이질 않았다.

 

딸 자식만 다섯을 포장마차를 하면서 홀로 키우고 다 시집 보낸 후,혼자 지하 방에서 살면서 찬모 노릇하며 노년을 보내다 쓸쓸하게 미아리를 떠났다.

 

LG그룹 계열사에 다니던 나는 IMF 때 퇴직을 했다.퇴직금과 조금 모아둔 돈으로 동생과 동업으로 음식점 하나 차리려 했었는데 아줌마가 극구 말렸다.

 

“아니야, 음식장사 하지마. 그리고 자네한텐 안 어울려.” 아줌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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