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한국요들50주년(2)] 요들클럽을 중심으로 요들 보급 이뤄져

풀로만목장 조영현 대표 인터뷰② “세계 두 번째로 만들어진 요들클럽이 전국에 요들보급”

이연지 기자 승인 2018.12.28 09:00 | 최종 수정 2020.03.18 14:07 의견 0

▲ 2010년 스위스 전국 요들 협회 창립 100주년 행사에 참여하며 스위스 리기산에 올라 알프혼을 연주했다. 아내 이은경 씨(왼쪽)와 풀로만목장 조영현 대표(오른쪽) ⓒ 조영현 페이스북

¶ 한국에 요들클럽이 만들어지다

▶ 시사N라이프(이하 ‘시사N’): 요들 하면 또 요들클럽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요들클럽을 만든 나라라고요

☞ 조영현 대표(이하 ‘조’): 우리나라 최초의 요들클럽은 1969년 4월에 생긴 에델바이스 요들클럽이에요. 스위스가 아닌 지역에서 만든 요들클럽으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에요. 1967년에 뉴질랜드에 사는 스위스 사람이 키위라는 요들 클럽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다음이 한국의 에델바이스 요들클럽인데 스위스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스위스 요들클럽을 만든 건 한국이 처음이에요. 이후에 1970년 12월에 대학생 클럽인 알펜로제 요들클럽이, 71년 2월에 인천 엔지안 요들클럽이 생겼어요. 또 각 지방에도 지방별 클럽이 생겼고요. 김홍철 씨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요들 강습을 했는데 그 강습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여 클럽을 하나씩 만든 것이죠.

▶ 시사N: 요들클럽에는 꽃 이름이 꼭 들어가던데.

☞ 조: 네. 원칙이 하나 있어요. 요들클럽을 만들 때는 지역이름, 스위스의 대표적인 3가지 꽃 이름인 알펜로제, 엔지안, 에델바이스 중 하나를 붙여 이름을 지어요. 그래서 부산 알펜로제, 인천 엔지안 이런 식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중 첫 번째 클럽이었던 에델바이스는 처음이라는 의미를 존중하는 뜻에서 서울 에델바이스가 아니라 한국 에델바이스라고 했어요.

▶ 시사N: 꽃 이름이 들어가니 클럽 이름이 더 운치 있게 느껴집니다. 클럽이 만들어지고 스위스 요들협회에서 기념품을 주었다고요

☞ 조: 1972년에 스위스 요들협회에서 스위스 관광청 주선으로 기념품을 주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어요. 원래는 김홍철 씨에게 주고 싶어 했는데 아무래도 국가 간 선물이다 보니 김홍철 씨가 대표로 활동하고 있던 한국 에델바이스에 ‘탄생을 축하하고 발전을 기원한다’는 글을 새긴 알프혼을 전달했습니다.

¶ 알프스의 통신 악기 알프혼이 국내에 들어오기까지

▶ 시사N: 요들이 알프스 뿔피리를 모방했다고 보기도 하던데요. 알프스에서 목동들이 서로를 부르기 위한 통신 수단이었다고요.

☞ 조: 네. 스위스를 대표하는 두 가지 민속음악이 요들과 알프혼이에요. 알프혼은 원래 스위스 비탈에서 휘어져서 자란 전나무를 잘라 속을 파서 그 모양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악기인데요. 요즘엔 그렇게 하지 않지만 처음에는 구멍을 뚫어서 입술로만 소리를 냈어요. 서양 관악기의 조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스위스 산에서 수목한계선을 넘어가면 풀밭이 펼쳐지는데 나무 없이 풀만 자라는 그 자리를 ‘알프’라고 하고 이 ‘알프’가 여러 개 모이면 알프스가 되는 겁니다. 그 산에 오른 사람이 저 산 아래 사람과 소통할 때 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요들이나 알프혼을 쓰게 됐습니다.

알프혼이 우리나라에도 전국에 몇 개 있었는데 배울 곳도 없고, 연주를 할 줄 몰라 대부분 장식이 되곤 했어요. 그러다가 80년대에 김홍철 씨가 <김홍철과 친구들>이라는 팀을 꾸렸는데 알프혼을 할 사람을 구했어요. 그 때 호른 전공자였던 경희대학교 학생이던 최완희 씨가 함께 하게 됐고, 이후에 요들클럽에서 알프혼 강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100여명 정도가 알프혼을 가지고 즐기고 있어요. 알프혼은 3옥타브까지 소리가 나는데 고음을 내기가 아주 어려워요. 또 음이 8개뿐이어서 원하는 대로 연주하려면 각자 연습이 필요합니다.

▲코레일에서 주최한 테마가 았는 열차여행 스위스 편에서 주한 스위스 대사관의 요청으로 테마 열차 안에서 알프혼 연주를하는 조영현 대표 ⓒ 조영현 페이스북


¶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요들을 즐길 수 있길

▶ 시사N; 개인기가 있어야 하는군요. 알프혼을 배우는 묘미가 그 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요들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요

☞ 조: 1970년대에 요들클럽이 피크를 맞이했어요. 요들클럽이 생기고 나서 70년대 말에 스위스에서 민속음악단이 왔는데요. 전국의 요들클럽 회원들이 모여서 민속음악단과 함께 음악 캠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국내에 퍼진 요들과 스위스 전통 요들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고 몇몇 사람들이 스위스로 가서 오리지널 스위스 요들을 배워왔죠.

에델바이스 요들클럽에 있던 민완기 씨가 스위스의 요들 최고지도자인 프란츠 스타델만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 분의 곡을 국내로 많이 가져왔습니다. 에델바이스 클럽은 스위스 요들을 위주로 했고 각 지역 클럽들도 각자 특성에 맞춰서 웨스턴 요들, 오스트리아 요들 등 주로 즐기는 분야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요들을 다양하게 즐기면서 전국 요들 캠프를 열면 100여 명이 넘는 회원들이 모일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지요.

▶ 시사N: 네. 197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요들이 올해로 50주년이고 또 한국요들협회가 생긴 지도 40년이 됐는데요, 앞으로의 요들 활등 계획은 어떠신가요

☞ 조: 스위스 요들 중 하나인 내츄럴 요들을 전하고 싶어요. 스위스 내츄럴 요들은 가사 없이 발성으로만 즐기는 건데, 이게 전승되며 찬송가의 후렴으로 붙게 되었고 나아가 요들 합창으로 발전했거든요. 그래서 이 요들 합창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위스에만 있어요. 그 밖에 한 사람이 부르면 다른 사람이 따라 부르는 요들도 있고요. 이렇게 다양한 요들의 장르가 국내에 더 보급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