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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리카(大?FREE?KA)’ (2)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43)

조연호 작가 승인 2019.03.27 15:12 의견 0

변화의 바람은 과연 불어올까 그리고 그 한두 번의 정치적 변화가 구태의연한 대구의 모습을 바꿀 수 있을까 ‘유토피아 플랜’에서는 대정치와 소정치를 구분하면서, 대부분 정치인은 재선출을 생각하기에 소정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구상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어야 실질적인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이 소정치에 머문다.

이제는 대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현상태를 탈피할 수 있다. 대구에서 살면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오로지 시민행복, 반드시 창조대구’라는 글귀가 여기저기 결의에 차서 설치돼 있었다.

좋은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업이다. 그러나 창조는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나날이 나이 들어가는 도시에, 미래를 향한 기대는 망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는 정치 연속성은 장점일 수도 있다. 대구 정치의 핵심이 변화하지 않으면 일관된 정책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다. 좋은 정책만 만들 수 있다면 오히려 강점이다. 물론, 발전을 위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부담을 줄 수 있다. 아울러 저항세력을 형성해서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할 수도 있다(물론, 오래 걸리고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더라도 계속 갈등 극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노예해방과 같은 일이다. 84 년이 걸렸다고 한다).

점진적으로 서서히 변화를 시도하면 많은 시민들과 공감하면서 문제점을 대비할 수 있다(필자가 말하는 보수는 에드먼드 버크의 ‘발전적’ 보수주 의를 의미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정치사상가로 그가 말한 보수는 변화하지 않음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맹렬히 비판했다) 정치적 성향은 어떤 측에 있다고 하더라도 장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떻게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줄이는가에 따라 도시 민주주의의 향방이 달라진다.

정치적으로 ‘큰’ 대구는 다양한 정치적 색깔이 공존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똘레랑스'를 처음 들었다. 한국에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통해 1990년대 중반에 소개되었고, 이후에 저자 홍세화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 른다’ 를 통해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했다.

똘레랑스는 쉽게 번역하면 관용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수용’이 아니라 ‘받아들임’을 말한다(수용은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고 생각의 동조까지도 의미한다면, 받아들임은 상대방 의견의 존재 자체만 인정한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과거의 해법이었지, 현대의 해법은 아니다. 똘레랑스의 기원은 서구 종교전쟁에서 파생했다. 구교와 신교로 나눠져서 종교가 다른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소멸했다. 너그러운 신의 이름과는 역설적인 잔학행위 중, 그 잔학함에 혀를 내두른 구교와 신교가 서로 인정하자는 의미에서 세워진 경계석이 ‘똘레랑스’다. 즉, 공멸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해법은 무엇인가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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