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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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3 11:33 | 최종 수정 2023.06.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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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 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경찰과 노동자가 서로에게 둔기를 휘둘렀다. 한 노동자가 경찰봉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릴 정도로 전투는 격했다. 극좌파는 이번 일을 고귀한 계급 투쟁으로 볼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다. 계급 구성원 다수에게 지지받지 못하는데, 계급 투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다는 말인가.
노동자가 피를 흘린 탓에, 이번 사태를 침착하게 보기 어렵게 되었다. 약자에게만 공감하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다쳤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이런 공감 능력이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지금까지 노동운동가는 수도 없이 민중집회를 열고 파업을 벌였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바뀐 것이 무엇인가?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이나 노동자 정당이 국회의 다수당이 되었나? 노동자 권리가 눈에 띄게 개선되었나? 이번에 흘린 피는 어떤 성과를 창출했는가 있는가? 침착하게 행동과 결과를 분석하지 않는 활동가가 과연 신뢰받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평화로운 편이 아니다. 산업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탓에, 우리나라 노동자는 대화보다는 집단 행동에 의존해야 했다. 노동시장이 이원화되고 노동자가 하나의 계급 정체성을 공유할 수 없게 되면서, 이 노동자의 파업은 저 노동자의 손해가 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운동가가 관심을 끌 방법은 과격한 행동 뿐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과격한 행동이 빠르게 성과를 창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꽤 많은 노동자가 시위하고 파업하고 체포되었지만, 우리나라의 노동권은 여전히 처참하다. 노동운동가는 정부의 무관심을 탓하지만,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면 그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실패했다.
노동자가 분신하고 머리에 둔기를 맞는 일은 분명 비극이다. 하지만 경찰만 탓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그런 일을 초래한 주범 중에는 효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투쟁해 온 다른 노동운동가도 있다. 안타까움이 매번 쓸모 있음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누군가가 경찰에게 폭행당해도 전국민적인 공분이 일어나지는 않고 있다. 그만큼 노동운동은 소수를 위한 활동으로 전락했다. 이제는 전략을 바꿔야 할 때다. 약자에 대한 공감 탓에 눈 앞의 현실조차 인정하지 못한다면 발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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