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의 500여 농가에는 구들장 아래에 ‘생강 굴’이라 불리는 특별한 저장고가 있다. 집을 지을 때부터 설계된 이 지하 공간은 생강을 영상 13도로 보관할 수 있게 해 이듬해 종자로 쓸 수 있게 한다. 온도를 맞추지 못하면 생강이 얼거나 썩어 못 쓰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온돌식 토굴 저장방식’이라고 불리며, 완주 봉동 지역의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전통농업시스템으로 2019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3호로 지정됐다.

이런 봉동 생강의 역사와 생강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몽리, 봉상 시앙(부제: 봉동 생강을 키운 모두)』이라는 책자가 출간됐다. 이 책의 저자이자 출판을 담당한 「도서출판 닻」 박대선 대표를 만났다.

「도서출판 닻」 박대선 대표 (사진: 윤준식)

■ 물길이 만든 생강의 고장

책 제목 『몽리, 봉상 시앙』을 풀이하면 ‘물의 혜택을 받는 봉동의 생강’이라는 뜻이다.

‘몽리(蒙利)’라는 말은 ‘저수지, 보와 같은 수리 시설로 물을 확보하는 행위’, 또는 ‘이런 수리 시설의 혜택이 있는 공간’의 의미를 지닌,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서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동은 물이 풍부한 땅이다. 지표면 아래 1~2미터만 파도 나오는 자갈들은 옛 물길의 흔적이자, 생강 재배의 최적 조건을 만들어주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봉동의 지형이 특별해요. 만경강 상류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이곳에서 만나면서 넓은 평야를 만들었죠. 생강 재배를 위해서는 습도도 높아야 하지만 물이 잘 빠져야 하는데, 이곳은 천혜의 조건을 갖췄습니다.”

■ 천 년의 향기, 봉동 생강을 말하다

“‘봉상’은 봉동의 옛 지명으로, 봉동에서는 생강을 ‘시앙’이라고 불러요. 생강의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 말은 함경도까지 퍼져 있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생강이 봉동에서 퍼져나간 것을 감안하면, 방언이 아니라 생강의 원시어일지도 몰라요. 천 년 넘는 역사를 가진 봉동 생강은 일제강점기 언론에유일한 산지로도 보도됐고,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만주까지 ‘봉상 시앙’의 명성이 알려졌습니다.”

15년 전 완주군에 귀촌한 후 지역에 애정을 갖고 살아온 박대선 대표는 봉동 생강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2년간 40여 개의 자연부락을 돌아다니며 생강과 관련한 이야기를 수집했다.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 감성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노력했다.

“마을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소중했어요. 충실한 자료가 되면서도 봉동 주민들은 물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 형태로 저술했어요. 이 내용을 통해 생강과 완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관계인구들도 염두했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깊어갔다. (사진: 윤준식)


■ Archive 01. 선구적인 지역 공동체의 역사

생강 산업이 한창이던 1930년대에는 봉상산업조합이 있었다 한다. 생강으로 한탕하려는 중간 상인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농민들이 자치적으로 만든 협동조합이다. 단순한 경제조직으로 그친 게 아니라 지금의 완주중학교를 설립해 조합원 자녀 교육복지와 함께 지역의 인재를 배출하고,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 조합원들에게 의료복지까지 제공하는 높은 수준의 조직이었다.

“우리나라의 9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윤건중 선생도 참여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조직이었어요. 지역사회 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죠.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시도였어요. 봉산산업조합의 존재는 봉동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뒷표지에 흑백 처리된 생강농사 사진과 최 어르신의 글 (사진: 윤준식)

■ Archive 02. 생강밭 일구며 살아 온 주민들 이야기

인터뷰 중 박대선의 목소리가 특히 감정적이었던 순간이 있었다. 생강 농사를 짓는 주민의 삶이 지역을 지탱한다고 강변한 순간들이다.

“책 뒷표지를 장식한 글은 신기리 주민 최 어르신이 직접 쓰신 회고의 글입니다. 글을 읽어보면 봉동과 생강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책이 완성되기 직전에 돌아가셨어요. 조금만 빨리 완성되었으면 책을 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수제 편강 제조 기술을 보유한 마지막 세대였던 이 여사님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구미리의 이 여사님은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생강농사를 지으며 자녀를 키우신 분이에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생강을 파시고, 편강(생강과자)도 직접 만드셨죠. 직접 편강을 만드시기까지의 이야기는 정말 눈물 없이 듣기 힘듭니다. 옛날에는 편강이 고급 과자였어요. 다방이나 스탠드바에서나 맛볼 수 있었죠. 냉동실에 있는 편강을 저도 맛보았는데 이 여사님이 만드신 편강은 공장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습니다.”

온갖 고생을 생강 농사로 버텨 낸 주민들의 이야기 (사진: 윤준식)
대패를 이용한 수작업으로 편강을 만들었다. (사진: 윤준식)


■ Archive 03. 자연과 공생하는 전통농법의 지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봉동생강의 전통농법으로 이어졌다.

“뿌리작물 특성상 생강 농사는 잘못 지으면 연작피해가 있어요. 그런데 봉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농법은 연작피해가 없어요. 양쪽 이랑에 보리를 먼저 심고 생강풀(참나무류 어린 순, 멀칭)을 덮기도 해요. 그러면 땅이 숨을 쉬고, 생태계가 살아나 농약도 필요없어요.”

70년대 전후로 농업에 기계화가 도입되고, 생강 농사도 다른 농업처럼 현대화된 방식으로 짓게 되었다. 그러나 연작피해만큼은 극복할 수 없었다. 이때 큰 힘을 발휘한 건 주민공동체의 역량이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오신 어르신들의 경험에서 방법을 찾았다. 어르신들의 구술을 통해 현대화 이전의 생강 농사에 대한 설명과 경험담을 수집했고, 그 결과 최근 전통농법을 통해 문제를 극복했다.

옛날에는 5월이 되면 농부들이 지게를 메고 산에 올라가 여린 가지를 베어 생강밭 위를 덮었다. 유기물인 넓은 이파리 등이 자연스럽게 썩어 들어가며 이를 먹이로 하는 생물들이 번성했고, 이를 농법으로 이용한 것이다.

“저녁이면 생강밭 위로 박쥐들이 날아들어요. 농약을 치지 않으니 날벌레들이 살고, 그걸 또 먹으러 박쥐들이 오는 거죠.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순환이에요.”

또 생강 파종 전에 생강밭 고랑 양 옆으로 보리를 심는데, 이미 생강밭에서 유기질 비료로 변화된 여린 가지들의 양분을 먹고 보리가 뿌리를 깊이 내리기에, 뿌리로 말미암아 생긴 공간은 생강밭이 숨을 쉬게 해줘 생강을 위한 좋은 토양이 만들어진다.

생강풀이 앙상히 다 마를 때쯤이면 보리 수확이 시작된다. 이때 남은 보릿대 또한 멀칭용으로 베어 덮으면 유기질 비료가 추가된다. 이렇게 조상들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담긴 전통농법으로 지금도 봉동 생강이 재배되고 있다.

■ 미래를 향한 기록의 가치

이런 내용이야 말로 아카이빙 활동과 아카이브가 갖는 가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인터뷰를 마치며 박대선 대표는 이 책이 기록을 넘어 지역의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은 시작일 뿐이에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게 봉동 사람들의 특징이니까요.”

완주의 로컬리티는 생강 뿐만 아니라 여러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박대선 대표. 요즘은 완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국도1호선과 동학농민혁명을 연결한 콘텐츠를 놓고 고심중이다. (사진: 윤준식)

※박대선

완주로 하방해 15년 차를 지내며 지역문화유산을 창달하는 ‘트리뷰트 전북, 집강소’ 운영. 서울예술대, 군산대 일반대학원에서 지역학 연구, 완주CB 명품도읍 삼례책마을 기획, 「삼례사람들」 마을신문 발간, 국토부 도시재생 인턴 멘토,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 대표 등으로 주민과 함께 ‘로칼칼한 삶’을 산다. 『몽리, 봉상 시앙』은 봉동읍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