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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유성엽 의원 "황토현 전승기념일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되기까지"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특집(1)] 유성엽 의원(상편) - 국가기념일 제정 비하인드 스토리

윤준식 기자 승인 2019.05.09 18:22 | 최종 수정 2019.07.15 14:41 의견 0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뜻깊은 해입니다. 첫 기념일인 5월 11일을 앞두고 시사N라이프는 뜻깊은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첫 인터뷰는 이번 국가기념일 제정과 동학농민운동 선양사업을 위해 오랫동안 힘써 온 민주평화당 유성엽 의원(전북 정읍시고창군)입니다. 함께 나눈 내용이 길어 상·하편으로 나눴습니다. 상편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중심으로 전합니다.

▲ 의정활동 기간 내내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을 위해 힘써 왔던 유성엽 의원.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문성을 가진 인물 중 하나다. ⓒ 이정환 기자

▶ 그간 동학농민운동 선양사업을 위해 힘써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가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제정했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 유성엽 의원: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과 예우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시행되면서 법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복권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전엔 ‘동학난’이라 호칭하는 등 동학의 의미를 낮춰왔는데, 시민사회의 많은 의견을 반영해 법적인 복권이 이뤄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념일 제정을 놓고 10년 넘게 논란을 이어오다가, 작년 4월 24일 종로 영풍문고 자리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들어선 것입니다. 4월 24일은 전봉준 장군의 서거일 아닙니까 전봉준 장군이 수감되고 처형되었던 옛 전옥서 터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들어서며 동학이 서울 시민의 품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였고, 금년 2월에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선양사업 기념사업을 추진할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1년 간 국회 의정활동 중에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지정을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곳곳에 남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

- 기념일 경쟁이 갈등될까 노심초사

▶ 기념일 제정에 있어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1894년 농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였고, 동학군과 관련된 장소와 사건이 다양하다보니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 힘들었다면서요

☞ 유성엽 의원: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과 기념식으로 인해 선양사업이 특정지역으로 한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각계각층의 의견을 신중히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민선3기인 2002년~2006년에 정읍시장을 역임했는데,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부농민봉기일’이나 ‘황토현 전승일’ 중에서 기념일로 지정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각각 고창군과 정읍시로 나눠져 있어 당시 이 문제로 저와 이강수 고창군수와 전북도지사, 셋이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었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된 2008년에도 ‘황토현 전승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는 개정안 발의까지 했습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읍과 고창이 한 선거구로 합쳐졌는데, 총선 과정의 토론회에서도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국가기념일 지정에 대한 질문이 던져질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큰 문제였습니다.

그때 입장이 참 난감했습니다. ‘황토현전승일’로 하게 되면 “저 사람이 정읍 출신이기 때문에 정읍 손을 들었다”고 할 것이고, ‘고부농민봉기일’로 하면 고부봉기일이 잘못 거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읍과 고창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다 보니 제3의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는 것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 흔들리는 문체부- "새로 시작해보자"고 설득

2016년 경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전주화약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교문위로 활동하던 터라 문체부에 진행여부를 물어보았더니 “2~3일 내로 절차를 정해서 발표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짐작하는 바가 있어 “무슨 내용으로 할 거냐”고 물었더니 “‘전주화약일’로 기념일을 발표하려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전주화약일’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날은 조정으로부터 뒷통수 맞은 날, 사기당한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결코 동학기념일이 될 수 없다. 새로 시작해보자”고 설득했습니다.

*전주화약(全州和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는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한 후 조정과 맺은 조약으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실시하고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을 설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개입이 이루어지며 합의는 깨어지고 만다.

1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폐정개혁안에는 신분제 철폐, 과부의 재혼 허용, 부패한 관리 처벌, 세제 개선, 토지개혁 등이 들어있었다. 피지배층이 작성한 개혁안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며, 일부 내용은 갑오개혁(甲午改革)에 포함되기도 했다.

집강소는 폐정개혁을 위해 전라도 53개 군에 설치한 자치기구였으며,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 서울 종각역 영풍문고 앞에 자리잡은 전봉준 장군 동상. 서거일인 4월 24일을 기념해 세워졌다. 그의 뜻을 기리려는 시민들이 놓고 간 꽃과 화환이 눈에 들어온다. ⓒ 김혜령 기자

☞ 유성엽 의원:다시 정읍, 고창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백상기포일’, 어떤 사람은 ‘전봉준 장군 서거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고창에서 태어나 정읍에서 활동하셨으니 전봉준 장군 서거일로 하면 어떨까도 생각했지만, 돌아가신 날을 기념일로 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정읍과 고창이 경쟁한다고 해서 이를 피해가거나 비껴가는 것은 동학혁명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7년 예산심의 소회를 마무리하며 도종환 장관을 만나 그간의 과정을 다 말했습니다.

“내 지역구 정읍과 고창의 경쟁에 의해 기념일 지정이 미뤄졌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낀다. 정읍과 고창 두 지역의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적 부담이 있지만 어떤 결론이 내려지던 싸안겠다. 도종환 장관도 짐을 싸안고 결단을 내려라. 그러나 정읍, 고창을 안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말입니다.

한편, 고창에서는 일부 전문가의 말을 빌려 “‘무장기포일’이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 거사로 최초 선언된 날”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장기포(茂長起包):

군수 조병갑을 쫓아내기 위해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군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해산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에 의해 동학군 지도자들은 고창군 무장면(현재는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으로 피신한다. 이후 3월 20일에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하게 되었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이 동학군을 이끌며 전국적인 혁명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 유성엽 의원:이미 1893년 11월에 작성된 ‘사발통문’을 보면 전국적인 거사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발통문’에 따르면 “전주성 점령 후 한양으로 진격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부봉기’는 지역적인 봉기고, 따라서 ‘무장기포’를 전국적인 거사 선언이라고 하는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는 듯 했습니다.

역사의 순서대로 보면 ‘사발통문-고부봉기-무장기포-백산기포-황토현전승’ 순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습니다. ‘무장기포’가 있었기 때문에 ‘황토현 전승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토현 전승일’을 기념일로 한다고 해서 ‘무장기포’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편에서 계속)

※ 취재와 기획에 도움을 주신 <동학컨텐츠연구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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