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1일 (사)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이 ‘한국의 지역주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추계정책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가 ‘무정란 정치와 지역주의’라는 주제로 발제를 맡았고 최흥석 고려대 교수와 김의영 서울대 교수, 정남준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 박용수 CBS라이프 대표이사,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습니다.
송호근 교수의 발제 내용을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 발표 기조가 ‘지역주의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지역주의는 약화되고 있다’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역문제의 심각성을 고민하고 그 해결방안을 찾고자 하는 호남미래포럼이 굳이 유명 학자를 초대해 ‘지역주의는 별 것 아니다’는 내용의 발제를 들어야 하는지 좀 의문이었습니다. 발제를 맡은 송호근 교수도 이 발제를 맡게 된 데 따른 당혹감 같은 것을 얼핏얼핏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지역과 경제 문제, 중첩구조가 아니라고
발제 내용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지역문제와 경제적 분배 문제가 중첩 구조는 아니고, 일종의 교차관계’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즉, 지역문제와 경제문제가 어느 정도 겹치는 지점이 있지만 그것은 사소한 측면이라는 주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송 교수는 또 ‘대선에서 영-호남 지역대립구도가 나타나지 않다가도 경제적 이슈가 제기되면 두 지역의 대립구도가 선명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발언도 하더군요.
기조발제와 토론까지 다 들은 뒤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일베는 말할 것도 없고, 네이버 등 포털에서도 호남에 안좋은 내용의 기사만 올라오면 온통 호남을 욕하고 저주하는 댓글로 도배가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과연 지역주의가 약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공공과 민간분야에서 호남에 대한 인사차별 현상이 숱하게 지적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학살 아닌가 송 교수께서 지역문제와 경제문제가 중첩구조가 아닌 교차관계라고 하셨는데 또 대선에서 경제적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가 선명해진다는 것은 모순된 얘기 아닌가”
발제나 토론이 아닌 그냥 질문이었는데 제 발언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나왔던 것이 특이했습니다. 저랑 같은 테이블에 앉아계시던 어떤 부인이 컵에 물을 따라주시더군요. 그날 그 행사에 오셨던 분들이 무슨 얘기를 듣고 싶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송 교수는 제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주지 않았습니다.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640"] 지난해는 우리나라에서 혐오 발언이 단순한 발언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파괴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현실화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10일 익산에서 진행된 신은미 황선 토크콘서트에 불만을 품은 고3 학생이 사제 폭발물을 던진 직후의 모습.
지난 1월 28일에는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가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종합계획에는 자치경찰제 도입, 지방선거제도 개선, 지방재정 확충, 중앙정부 권한 지방 이양, 특별·광역시 기초의회 폐지, 광역시·구청장·군수 임명제 도입, 책임 읍·면·동제 실시, 긴급재정관리제 시행, 교육자치와 지방자치의 연계 및 협력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이번 종합계획에 대해서는 자치단체장 등의 반발이 거셉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기초의회 폐지와 광역시·구청장·군수 임명제 도입 등이 불러올 정치 예비군의 진로 제약이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이러한 변화가 시·군·구의 통합 움직임과 결합하면 지방자치단체나 의회를 거쳐 중앙무대로 진출하고자 하는 방대한 정치 예비군들이 졸지에 갈 길을 잃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설명회 현장에서 제가 좀더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약간 달랐습니다. 교육자치와 지방자치의 연계 및 통합 노력이라는 부분에 귀가 쏠리더군요. 사실 지방자치와 교육자치가 이렇게 분리돼있는 경우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 부문의 통합은 박근혜정부가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그 부분을 질문했습니다.
“오늘 종합계획은 여러 가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기술적인 측면이 강조된 느낌이다. 지방자치 발전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철학이나 원칙에 대한 선언문 정도가 함께 들어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각 지방의 상호선린이나 협력의 정신 같은 것이 거기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5.18의 경우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이지만 대구에서는 폭동으로 규정해서 교육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 지방자치와 교육자치가 통합될 경우 그런 위험성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본다.”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원론적인 차원의 내용을 다시 한번 언급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월 21일에는 <좌파논어>의 저자이신 주대환 선생이 주도하는 세수포럼(이름이 우아해서 그 뜻이 궁금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냥 세번째 수요일에 모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에서 ‘해방정국 이승만의 노선과 활동의 조명’이라는 주제로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발제는 최건섭 변호사님이 맡아 주셨고 이왕재 한국미래리더십아카데미 대표와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토론자로 참여하셨습니다.
박정희 이승만 대통령 복권에 숨은 '섬찟한' 의도
세수포럼 참석은 이승만 대통령과 해방정국이라는 예민한 소재가 주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특히 우파 진영의 이승만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한우 부장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이한우 부장은 “이승만을 다루는 토론이라면 내가 빠질 수 없어서...”라고 포럼 토론자로 참가한 이유를 설명하더군요.
발제 내용도 충실했고 토론자들의 발언도 재미있었습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 여전히 무척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고 이한우 부장에 대해서도 나름 선입견이 있었습니다만, 이날 이한우 부장의 발언은 내용도 충실했고 논리 전개에서도 객관성을 잃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태도도 매우 정중했구요.
하지만 이날 이한우 부장의 토론 발언을 통해서도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이한우 부장에게 던진 질문의 요지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정국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정치적 내공과 경륜이란 점에서 단연 두드러진 존재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역사적 평가를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우파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를 시도하는 것은 그 의미가 결코 역사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항상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 속에서 그들은 죽은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이슈이기 때문이다.
최근 서북청년단 재건을 내세우는 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깃발이 바로 이승만의 재평가에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승만의 당시 행적을 정당화하는 의도가 현재 반정부 세력을 죽창으로 찌르고 혀를 뽑아 죽여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려는 것 아닌지 궁금하다. 이러한 우파 논리는 거의 100% 호남에 대한 저주와 증오로 이어지곤 한다.
일베 사이트의 경우 매일처럼 ‘호남/홍어들은 대한민국과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다 목을 잘라 죽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한다. 단순히 일베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최대 포털인 네이버에 호남 관련 불미스러운 사건 기사가 올라오면 똑같은 내용의 댓글이 수없이 달린다. 이런 인종주의적이고 반인륜적인 언행이 과연 박정희 이승만 재평가 및 복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다른 분들이 던진 질문과 뒤섞인 때문인지 이한우 부장은 토론 도중에는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만 토론회 끝나고 명함을 교환할 때는 “좋은 질문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제가 앞에서 소개한 세 개의 세미나와 설명회, 토론회는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 문제를 직접 다룬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사안도 그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과연 이것이 제 편견 때문일까요 목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과 망치의 문제로 보인다고, 지역차별 문제를 다루다 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가 이 문제로 귀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시 현상이 생긴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저 세 개의 모임에서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해서 좀 속시원하고 정직한 답변이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서건 아니건 나는 우리 사회가 이 문제, 이 질문에 대해서 흔쾌한 답변을 제시해주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저는 일베 사이트의 등장과 영향력 확대도, 박정희와 이승만의 복권 시도도 결국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형에서 파생된 현상이라고 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권력의 창출과 유지라는 핵심 정치 이슈가 이 문제와 직결돼 있다는 겁니다. 87년 체제 이후 군부 엘리트의 물리력 대신 선거 승리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기득권의 입장에서 100% 선거승리의 공식이자 불패의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호남 대 반호남 구도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바로 거기에서 현재와 같은 반호남 인종주의가 싹튼 것이구요.
단순한 지역감정이 아니라 권력 창출의 무기
특정 지역과 인종, 사회 문화 집단에 대한 편견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인종적 문화적 역사적 동질성이 매우 높은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의 특정 지역에 대해 이렇게 인종주의적 혐오와 증오, 학살 선동이 만연하고 일상화된 경우는 아직 유례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정신병적 인종주의를 내버려두고 도대체 무슨 진보를 얘기하고 사회 발전의 담론을 얘기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좌우도 없고, 진보 보수의 구분도 없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완벽한 좌우동거, 국공합작, 반호남 대연정 전선이 철통처럼 단단하게 구축돼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절망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아무리 거창한 담론, 천하를 뒤엎는 경륜이 있어도 말짱 헛것입니다. 허공에서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봅니다. 경륜과 지혜를 갖춘 고수들의 진지한 고민, 문제 해결 노력에 대한 동참을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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