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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7)] 10억을 받았습니다.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1.23 10:48 의견 0
“10억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방송됐던 모 보험회사의 CF를 볼 때마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그래서 저 여자는 남편이 남겨준 돈으로 저 잘 생긴 라이프 플래너랑 재혼을 해서 잘 살겠구나’

 

라는 시답잖은 생각이다. 또 하나는 둘째 동생의 친구이며 내 3년 후배인 승엽이에 대한 생각이다.

 

8년 전 할머님 상에 조문하러 온 명환이 친구들을 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멋지고 늠름하다. 대학 졸업 후 IBM에 취직해서 지금까지 근무하는 상준이는 참 잘 생겼다. 머리가 벗겨져 지금은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지만 여전이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고 유모가 풍부한 성균이, 광고쟁이 외골수 새호, 대학 연구원으로 일하며 아직도 총각인 상기 등 동생의 친구들이 다 모였는데 승엽이만 빠졌다.

 

승엽이와 자주 가던 동네 호프집은 로또를 파는 구멍가게가 됐다. <p class=(사진 : 이정환)" width="550" height="367" /> 승엽이와 자주 가던 동네 호프집은 로또를 파는 구멍가게가 됐다. (사진 : 이정환)

 

승엽이 아버님은 모 구청 과장으로 근무했다. 워낙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는데 몇 년 전 등산 하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사는 곳이 워낙 도봉산에 가까운 동네인지라 도봉산의 등산로는 눈 감고도 등반할 수가 있었을 텐데 조금 방심을 하셨던 것 같다. 바위와 바위의 간격이 약 40센티 되는 등산로가 있었는데 그 길을 건너 뛰다가 나뭇가지에 배낭이 걸려 낙상을 했던 거다. 즉사를 하셨다.

 

승엽이는 집안에서 골칫거리였다.

 

사람은 착하고 말할 나위 없이 성실했는데 부모님의 성에 차질 않았던 거다. 위로 누나 하나가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는데 누나와 동생은 모두 명문대에 진학해서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잘 했다.

 

하지만 승엽이는 공부와는 적성이 안 맞았다. 몇 번의 재수를 했지만 결국 대학 진학에 실패했고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승엽이의 아버님이 근무하는 구청의 관할 구역에 있는 방산 시장에서 지물포에 취직해서 일을 배운 후, 그 곳에서 지물포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관할구역 내라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말이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면 과일도 한 상자씩 사오곤 했었다. 짠돌이 승엽이도 쓸데 쓸 줄 아는 놈이었던 거다.

 

“에이, 형님 저 짠돌이 아니에요.” 라며 웃던 그 놈, 성실하고 부지런했었는데 집안에선 마음 고생이 무척이나 심했었나 보다. 아버지가 가신 후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누나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겨내질 못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으로 표현을 안 했지만 학력차이와 외모 때문에도 자격지심을 많이 가졌던 거다. 승엽이는 언챙이다. 어릴 적 수술을 해서 겉으로는 못 느끼지만 말을 할 땐 코 맹맹 소리가 심했다.

 

“형님, 저 술 좀 사주세요.”“에이 짠돌이 놈,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다 어디에 쓸 거냐 한 번쯤은 네가 사봐라.”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이놈은 넉살 좋게 나보고 술을 사라고 항상 졸랐다. 친구들 사이에선 그런 돈에 대한 억척스러움() 때문에 조금 미움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내 눈엔 귀엽게 보이기만 했는데.

 

그런데 IMF가 터진 그 해 1월에 그 놈은 아버지를 따라 갔다. 급하게 하늘 나라로, 32살이란 어린 나이에…..

 

“형, 승엽이가 죽었대”“뭐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동생의 다급한 전화에 사무실에서 회의 중이던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아마 자살한 것 같아. 나 지금 수유리 대한병원 영안실이야.”“알았다 형이 지금 회의 중이니까 저녁에 가마”

 

사망추정시간은 새벽 6시였다.

 

아버지 1주기 기일에 죽은 거다. 승엽이 아내의 말에 의하면 전날 저녁밥을 먹더니 잠깐 나갔다 온다고 나간 후 산에 오른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가 떨어져 죽은 그 바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밤을 새운 모양이다.

 

보험사 직원들이 난리법석이다.

 

“자살이라니까요. 아시죠 보험 들고 2년이 안돼서 자살로 사망하면 보험 처리가 안 된다는 거”

 

하지만 결국 자살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다. 승엽이가 죽기 전에 보험을 몇 개나 들었는지 승엽이 아내는 당시 돈으로 7억이 넘는 보험금을 수령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10억이 훨씬 넘는 돈일 거다. 똑똑한 딸들을 외아들보다 편애하는 어머니 그리고 기가 드센 아내 틈새에서 기를 펼 수 없었을 거라는…… 그리고 학력과 외모 콤플렉스가 그를 이승에서 내몰았을 거라고만 추정한다.

 

“제수씨 잘 지내시죠”“............................”

 

가끔 동네에서 승엽이 아내를 만나면 나는 아는 체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도 안하고 지나친다. 승엽이가 죽은 후 3년 정도까지는 명절 때가 되면 친구들이 승엽이네 식구들을 위로도 할 겸 집으로 방문하곤 했나 보다.

 

“제발 좀 오지 마세요.”갈 때마다 악을 쓰는 승엽이 아내 때문에 이젠 인연을 접었단다.

 

며칠 전 할머님 상가에서 모인 동생 친구들을 보니 승엽이가 생각 났다.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라이프 플래너가 어쩌고 하는 광고를 보면 승엽이가 생각난다. 승엽이 아내는 재혼을 안하고 시어머니 모시며 외동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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