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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3)]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光化門)'과 해치

시사-N 승인 2018.01.31 13:25 의견 0
월드컵응원과 시민 촛불집회 등 대한민국에 굵직한 일이 있을 때 마다 시민의 결집장소로 우리에게 친숙한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또 광화문의 동쪽 담장 끝과 서쪽 담장 끝에 궁궐을 지키기 위한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세워 조선의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궐문의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광화문의 모습 <p class=(사진 출처 : 경복궁 사이트)" width="393" height="273" /> 광화문의 모습 (사진 출처 : 경복궁 사이트)

 

광화문은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은 오직 왕만이 다닐 수 있는 문이었고 왕세자와 신하들은 양쪽의 다른 문으로 출입했습니다.

 

광화문도 자기 모습을 찾는 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일제강점기 시대였던 1927년,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동문인 건춘문 쪽으로 옮겼고 6.25전쟁 때는 폭격을 당해 문루가 모두 사라지기도 했답니다.

 

1968년 광화문의 위치를 원래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광화문을 세웠던 당시와 동일하게 나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를 사용한 데다 위치 또한 정확한 곳이 아니었지요. 결국 광화문은 2010년 다시 복원공사를 실시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죠.

 

광화문 앞에 자리한 해치의 모습 <p class=(사진출처 : pixabay)" width="550" height="309" /> 광화문 앞에 자리한 해치의 모습 (사진출처 : pixabay)

 

광화문 앞에는 전설 속의 동물 ‘해치’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해치는 몸 전체가 비늘로 덮여있고 머리에는 뿔, 목에는 방울이 달려있으며 겨드랑이에는 날개를 닮은 깃털이 있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져 경희궁 숭정전,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연경당 등 궁궐 입구에 세워 왕궁을 지키도록 했죠.

 

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 사람이 착한지 나쁜지, 또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판단하는 영험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부정을 감찰하는 사헌부 관원이 머리에 쓰는 관과 사헌부의 장관인 대사헌의 관복의 가슴부분에 자수를 놓아 정의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또 관원들은 궁궐에 드나들며 ‘마음의 먼지’를 터는 의미로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었다고 합니다.

 

광화문과 해치, 옛 모습을 잃어버리다.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궁궐은 아홉 번 쌓은 담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말로 그만큼 왕과 만나는 과정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을 만나기 위해 지나는 첫 번째 문이 광화문입니다.

 

경복궁이 처음 만들 당시 정도전은 광화문을을 오문(午門) 또는 정문(正門)으로 불렀습니다. 이후 세종 16년에 집현전 학자들이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준다’와 ‘임금님의 은덕이 온나라에 비춘다’는 뜻을 담아 ‘광화문’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당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이후 올바르게 복원되지 못해 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광화문 옆 두 개의 해치상도 일제강점기 당시 피해를 입었습니다.

 

1923년 10월 2일 열린 박람회 ‘조선부업공진회’ 때 해치상은 강제 이동됐고, 그 6년 뒤에는 조선총독부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광화문 복원 작업으로 이리 저리 옮겨지다던 중 오른쪽 해치의 왼쪽 다리에 금이 갔습니다. 가끔 광화문을 지나다 해치상을 마주칠 때마다 부러진 흔적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Tip.다리가 부러진 해치상의 흔적을 찾아 사진으로 남기는 것만으로도 경복궁의 수난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듯 합니다.[이재권 / 한누리역사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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