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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있는풍경(1)] 서울시내 한복판 노마드들의 술집, 인사동 유목민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6.22 13:48 의견 0

"형 이따 인사동에서 한잔 마셔요""그래 유목민에서 보자" 우리들에게 유목민은 그런 술집이다.

인사동에서 한잔 마시자면 그건 유목민일 확률이 90프로 이상이다.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촛불시민들의 뒤풀이 장소다. 블랙리스트들이 모이는 술집이다. 유목민의 벽엔 이명박과 박근혜를 고발하고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글과 세월호사건을 원망하는 낙서들이 빽빽하다.

왼쪽부터 한라산의 이산하 시인, <눈물에 금이 갔다>의 김이하 시인, 영화 <유신의 추억>의 이정황 감독, <나는 둥그런 게 좋다>의 박정배 시인, 이 넷은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사진: 이정환)

천상병 시인의 DNA를 물려받은 인사동 예술인들은 지금도 인사동의 옛 풍류를 그리워하며 유목민에 모인다. 엊그제 비 오는 수요일 인사동이 소란했다. 매주 수요일은 인사동 갤러리들이 새로운 전시회를 오픈 하는 날이다. 자연스레 전시회 오프닝 행사 후 뒤풀이로 주점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인사동의 수 많은 술집들 중에 예약 1순위가 유목민이다.

유목민의 전활철 사장이다. 전직 방송 프로듀서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사진: 이정환)

이날도 여러 전시회가 문을 열었다. 그중에 화가 유혜정의 개인전을 보러 '갤러리H'에 들렀다. 전시를 본 후 나서며 "혜정아 뒤풀이 장소 정했어 나 유목민에서 한잔 마실 예정인데 거기서 보자"고 유혜정에게 말을 꺼냈다. "칫! 내 뒤풀이 장소를 왜 오빠가 정해요" 얼마 전 있었던 나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아직 마음이 안 풀린 모양이다.

이산하 시인과 유목인의 또 다른 사장 박혜영, 시인 이산화와 매우 친하다.

(사진: 이정환)

최근에 '제주4.3사건'을 다룬 시집 <한라산>의 복간으로 한참 바쁜 이산하 시인과 만나기로 한 유목민으로 향했다. 6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인데 여러 자리가 차있다. 모이기로 한 다른 멤버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정작 만나기로 한 주인공인 이산하 시인이 늦어진다. 전화를 걸었다. "내일 만나기로 한 거 아니야"라는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이산하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다.

이산하의 절친인 <유신의 추억>의 감독 이정황이 수화기에 소리를 친다. "아! 너 때문에 몇 명이 모였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어서 튀어와." <눈물에 금이 갔다>의 김이하 시인과 곧 개봉할 영화 <질투의 역사> 정인봉 감독 등과 막걸리가 여러 순번 돌고 취기가 슬슬 오른 후에야 이산하가 도착했다.

화가 유혜정 일행들의 뒤풀이

(사진: 이정환)

이미 열명 이상이 모였다. 유목민은 그렇다. 혼술이 절대 불가능 한 곳이고 손님들의 자리가 레고블록처럼 '이렇게 저렇게' 조합이 되는 곳이다. 잠시 후 인사동 문화예술인들의 대장 격인 사진가 조문호 선생이 기분 좋게 술기가 오른 얼굴로 들어온다. 우리 자리에 합석한 후 소주 몇 잔을 마신 조문호 선생은 더 이상 못 마시겠다며 자리를 뜬다.

사진가 조문호 선생은 대표적인 유목민 애호가다.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인사동에서 술 마시는 모임'을 이끌고 있는데 주무대가 유목민이다. 이날은 모임에 다른 장소에서 있었던 듯 한데 그 자리에서 한잔 마신 후 아쉬움이 남아 유목민에 잠시 들른 모양이다.

조문호 선생이 자리를 뜨자 시집 <나는 둥그런 게 좋다>의 노동자시인 박광배가 들어온다. 박광배, 김이하, 이산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거기에 영화감독 이정황까지 동갑친구들 4명이 모였다. 넷은 얼큰하게 취해 서로 상스런 욕을 해가며 장난을 친다. 개구쟁이들 같다. "야 광배야 장난으로 머리를 툭 친 걸 가지고 나한테 맞았다고 산하한테 일렀다며 이 쫌팽아." 이정황 감독의 말에 모두들 폭소를 터트린다. 박광배는 얼굴이 발개지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유목민은 사진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앉은 이가 인사동 터줏대감 사진가 조문호, 다큐멘타리 사진계의 맏형이다. 민사협을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하다. 촛불정국 때 광화문에서 <광화문미술행동>을 이끌었다.

(사진: 이정환)

"활철 형, 오늘은 노래 한 곡 안 뽑아" 이정황 감독이 한마디 한다. 유목민의 주인장인 전활철 사장은 흥이 오르면 자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산울림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가 18번이다. 다른 노래는 들어보질 못했다. "야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서 노래 부를 시간이 없어. 다음에 부르자."

유목민은 사장이 둘이다. 또 한 명의 사장은 주방을 책임지는 박혜영이다. 유목민의 맛깔스런 술안주는 그녀의 손끝에서 나온다. 명란젓두부김치, 홍어회, 홍어찜, 해물김치전, 해물파전, 오징어숙회, 문어숙회, 대구탕, 생선구이, 고등어조림, 김치짜글이찌개 등과 가끔은 서비스로 내주는 소면, 모든 음식이 정갈하고 맛깔지다. 박혜영은 유목민을 찾는 남자들의 누나이며 동생이며 연인이다.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는데 화가 유혜정 일행이 들어선다. "야! 너 유목민엔 안 온다며" 내가 한마디 꺼냈다. "누가 오빠 보러 왔어요 전시뒤풀이 마치고 2차로 온 거에요. 오빠가 지금까지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라며 볼멘 소리를 낸다.

결국 유목민에서 다 만난다. 인사동 유목민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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