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22)] 흥선대원군, 민생안정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다

– 송군호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2)

김혜령 기자 | 기사입력 2018/07/13 [10:24]

[경복궁_이야기(22)] 흥선대원군, 민생안정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다

– 송군호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2)

김혜령 기자 | 입력 : 2018/07/13 [10:24]

해설: 흥선대원군은 나라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집권했다. 조선 후기라는 표현 자체가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기를 말해 준다. 나라가 안정된 시기를 후기라고 일컫지는 않는다. 이런 복잡한 시기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내놓는다.

 

송군호선생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민생안정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백성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일이었어요. 보통 권력을 잡은 인물은 왕권강화에만 관심을 기울이지만, 흥선대원군은 민생안정책을 꾀하고 난 뒤 왕권강화를 추진했습니다.

 

해설: 흥선대원군은 당시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했던 백성들의 삶을 정상화하기 위해 세금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조선시대 세금제도는 전정, 군정, 환정으로 나뉘었다.양반들이 교묘하게 피해간 세금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흥선대원군은 세금제도 개혁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들에게도 똑같이 세금을 부과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 백성들의 환호를 받다

 

송군호선생님 ☞ 우선 양전사업을 실시합니다. ‘양전사업이란 토지를 늘리는 사업입니다. 토지는 정해져 있는 건데 어떻게 이를 늘릴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 존재하는 토지였지만 세금을 줄이기 위해 장부에 기록하지 않은 토지, 장부에 없었지만 새로 개간한 토지들을 찾아내 장부에 기록함으로써 서류상 토지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양전사업을 통해 숨겨진 토지를 조사하면서 탈세를 막고 국고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군정을 호포제로 개혁했습니다. 호포제란 호 단위로 포를 걷는 정책으로 조선정부의 군역 면제 제도였습니다. 16세기 이후 양반은 학생이라는 명목 아래 군역을 면제 받고 대신 포를 한 필씩 내왔습니다. 그러나 조선 창건 300년이 지나면서 중앙정부가 흔들리자 군정를 제대로 걷지 못하고 일반 백성들의 허리만 더 졸라매는 세금으로 변질되었습니다.

 

▲ 경상도 영천지방호포제 실시 이전과 이후 군세 부과 대상층의 변화     ©김혜령 기자

 

송군호선생님 ☞  이에 흥선대원군은 백성 뿐 아니라 양반들 역시 호단위로 세금을 부과합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하기 이전 정남(군역대상자인 16~60세 남성)을 대상으로 걷은 군정이 15%에 그쳤지만 호포제 실시 이후 74%를 넘기며 세금도 큰 폭으로 확충됩니다.

 

해설: 세제개혁을 백성들의 부담은 크게 줄은 반면, 양반들의 부담은 크게 증가했다. 이에 많은 양반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왕권 회족을 위해 민생안정을 기반으로 한 개혁을 멈추지 않았다. 백성들의 지지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송군호선생님 ☞ 19세기 백성들을 가장 어렵게 한 것은 환곡이었습니다. 환곡은 처음엔 백성을 돕기 위해 등장한 제도입니다. 환곡이란 원래는 봄에 굶는 백성들을 위해 춘대추납’,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와 더해 곡식을 갚게 하는 좋은 제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정부 통제력이 떨어지자 여기저기 불법이 일어나고 백성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관리들이 환곡제도를 악용해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업을 한 거죠.

 

조선후기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은 좀 먹은 쌀 두말 주고 온전한 쌀 5말을 받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만 보아도 환곡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죠. 이에 흥선대원군 지지자 중 한 명인 조두순이 면 단위의 창고제인 사창제를 건의합니다.

 

해설: 사창제는 4~5개의 마을 단위로 나누어 국가가 백성에게 빌려주는 쌀을 주면 마을 사람들이 사()단위의 창고를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농민들 중 지식인층에 해당하는 사람을 사수, 사의 대표로 선발해 약 봄에 빌려간 곡식에 20%의 이자를 더해 갚게 했다. 이렇게 하면 공무원이 환곡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고리대를 시행할 수 없게 되면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 없어 졌다.

 

송군호선생님 사창제는 원래 15세기부터 이미 조선에 있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없게 되었고 지방 재정이 불안정해지자 고을의 수령들은 관아의 운영비를 환곡을 통해 충당했습니다. 사창제 부활로 지방 관리들의 극렬한 반대를 얻었으나 점차 큰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 흥완군 의복. 의제 개혁이후 넓은 소매가 좁게 변화했다.   ©문화재청


송군호선생님 ☞ 세금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흥선대원군은 복장을 바꾸는 의제개혁도 단행합니다. 조선시대 남성들은 소매가 길게 늘어진 옷을 입었으나 흥선대원군 시기에 소매를 반으로 잘라 제작하게 합니다. 여성들에게는 당시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가체머리를 금지시켜 절약을 강조했습니다. 가체머리란 예전에, 부인들이 머리를 꾸미기 위하여 자신의 머리 외에 다른 머리를 얹거나 덧붙이던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요새 말하는 붙임머리를 말합니다. 가체는 여인들의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죠.

 

흥선대원군은 이를 금기하며 근검절약을 강조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으로 생활이 윤택해지게 된 백성들은 집권 초기의 흥선대원군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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