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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25) - 힘겨운 모국어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8.25 09:00 의견 0

리진 선생과의 대화는 2시간 이상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이진 선생이 대화를 계속하는 것을 힘들어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체력적인 이유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실상 모국어로 이렇게 복잡하고 고급스러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저로서는 너무 오랜만이어서 마치 소화불량에 걸린 것같은 느낌입니다. 대화에 포함되는 모국어 개념과 용어들을 다루는 것이 너무 낯섭니다.”

모르기는 해도 선생이 평생 대부분의 기간에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 것은 거의 러시아어를 통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니 한국어를 통해서 그런 주제를 토론하는 것이 무척 낯선 경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은 그 자리에서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만나자마자 낯선 사람의 집에 찾아간다는 것이 좀 무리같기도 했지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다행스럽게 선생의 집은 그다지 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댁에서는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차를 대접해주어 별로 불편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리진 선생이 나를 댁으로 초대한 것은 아마 나에게 줄 것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대화를 마칠 때쯤 자신의 시집에 서명을 해서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선생이 시인으로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다양한 삶과 경험을 정리하는 의미를 담은 시집 같았다.

▲ 리진 선생은 자신의 시집에 직접 서명을 해서 선물해 주었다. ⓒ 주동식

시집의 제목은 <해돌이>. 1989사수싀출판사가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수싀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당시에는 정황이 없어서 내용이나 책의 판권 등을 살펴보지 못했고,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못했다. ‘<즁가르산 시초>에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귀국한 뒤에 시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낯선 낱말이 너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어 어휘도 있겠지만 분명 우리말인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도 많았다. 선생이 어린 시절에 들으며 자랐던 북한 지역의 사투리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악싸칼>이라는 작품에 나오는악싸칼은 러시아어 같기는 한데,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길손대접>이라는 작품에 나오는유르따임자라는 말도 그 뜻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자연히 이 시집을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가라는 호의를 사양하고 리진 선생 댁을 나와서 숙소로 돌아가면서 나는 헤아리기 어려운 복잡한 심정이었다. 쏘련에 가서 처음으로 내가 무척 낯선 땅에 버려졌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 그보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그런 복잡한 심사가 나를 흔들고 있었다.

리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쏘련 여행 중 가장 깊은 내용까지 건드리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로서는 지금도 무척 행운이라고 느낀다. 쏘련에서도 별로 많지 않다는, 사회주의 당 조직의 연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고 게다가 문학적 관점까지 비슷한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리진 선생은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내가 그걸 다 기억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왜 그때는 취재라는 의식을 갖고 메모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내 어리석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선생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나 선생의 얼굴 사진조차도 남겨두지 못했다.

선생의 주소를 물어보지도 못했다. 지금같으면 이메일 주소를 물어보면 간단했겠지만 어쩐지 당시에는 쏘련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상상 자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지금쯤은 세상을 떠나셨겠지. 아니, 혹시 살아계실지도.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생의 시 <길손대접>의 전문을 옮겨싣는 것으로 죄송한 인사를 대신한다.


<길손대접>

-리진-

처음 오르는

높고 깊은 산

종일 헤매돌다가

불빛을 찾아갔더니

양기름불에

가느다란 눈이 더 가는

유르따임자

길 잃은 얘기

물어가며 권하시네

따가운 차잔

어줍음없이

가리개 없는 막에

자리 펴주며

래일 갈 먼길

길잡이걱정 말라는 말로

밤인사

대신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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