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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33)] 서독, 기나긴 배상금 문제에서 벗어나다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5.30 10:25 | 최종 수정 2019.11.20 14:02 의견 0

경제정책에서 사회적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 대 계획경제, 서독에 의한 통일을 전제로 한 통일의 유보 대 신속한 중립화 통일로 각을 세운 기민련/기사연과 사민당의 1949년 8월 14일 총선에서의 대결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사민당의 패배로 끝났다.

기민련/기사연(CDU/CSU) 31.01%(155석), 사민당 29.22%(131석), 자민당(FDP) 11.92%(52석)이었다. 사민당은 대연정 제안을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기민련/기사연, 자유민주당, 독일당의 우파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콘라트 아데나워 기민련 당수가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총리로 선출되어 신생 서독의 국가 기초 작업에 나섰다.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서독은 강력한 반공주의적이고 친서방 노선을 내세우면서 전후 복구에 나서게 된다.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하고 총선에 의해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아데나워 총리가 취임하면서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독은 여전히 전승 4강국의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최종결정권 유보 그리고 점령조례에 의해 주권을 제약 받고 있는 국가였다. 점령조례에 의해 서독은 외교권이 사실상 없어서 외무부가 없었다. 대외 관련 업무는 총리실에서 처리하였다.

아데나워 내각은 전후 복구에 매진했지만 모든 산업시설이 폐허로 변했고 그나마 남은 것도 배상금으로 철거되면서 시설과 원자재의 격심한 부족으로 서독은 1950년에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실업률은 거의 10%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냉전을 심화시키고 서독을 서방체제 깊이 편입시키는 한편 서독 경제 기적의 계기가 되었다.

물론 서독 국가 출범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마샬 플랜의 지원을 받았지만 당시 서독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생산제한은 여전하였다. 사실 서독은 1948~1951년 기간 중 유럽의 마샬플랜 수혜액에서 영국, 프랑스에 이은 3번째 국가였다. 영국이 32억9700만 달러를 받은 데 비해 14억4800만 달러를 지원받았던 것이다다.

이는 배상금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데나워의 요청에 의해 1949년부터 공장 해체, 철거가 중단되면서 1951년에 사실상 종결되었고, 생산제한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무기를 제외하고 사실상 완전히 해제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미해결 국가부채는 여전히 서독의 신용 확보를 막고 있었다.

1953년 런던 채무조약(Agreement on German External Debts)은 2차대전 전 및 점령기간 중의 채무 문제를 해결하여 서독의 대외 신용 확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런던에서 독일 채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채무국인 독일과 채권국과 민간 채권자들이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말하는 독일 채무는 1933년 나치스 독일이 사실상 모라토리움을 발표하기 이전의 채무와 전후 점령 비용에 따른 채무였다.

전전 채무는 주로 1차대전 후의 평화체제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독일의 배상금 채무로, 당시 독일의 배상금 채무 해결을 위하여 미국의 도스 안 및 영 안에 따른 채무 즉 주로 미국에 대한 채무였다. 여기서 미국 주도로 독일 채무는 63% 가까이 대폭 삭감되고 그 상환도 3년 거치기간을 포함하여 1983년까지 분할상환하기로 하였다.

런던 채무회의가 서독에 대하여 관대하였던 것은 한국전쟁으로 소련과의 긴장이 고조되어 건전하고 민주적인 독일 재건에 대한 기대가 강해진 때문이었다. 미국이 20억 달러 채무 면제를 결정하였을 때 이는 1945년에 패배한 적이 이제는 귀중한 동맹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리고 1953년에 미국은 여전히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 해 미국의 전체 군비 지출은 530억 달러였다. 미국의 채무 탕감이 서방 동맹 중 서독의 충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는 가격 면에서 저렴한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및 조약에 참가한 다른 모든 채권자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이제 서독은 채무 불이행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자금조달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서독에 대한 시설 해체에 의한 배상금 지급은 완료된 것으로 선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 제한이 철폐되었다. 미국 중심의 서방 진영 입장에서 서독은 동서 대결의 유럽 최전선으로 경제 및 군사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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