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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in] 미디어아트 '속삭이는 대지': 초토화작전 그 후 70년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1)

윤준식 편집장 승인 2024.06.30 19:37 | 최종 수정 2024.07.01 23:20 의견 0
아르코미술관 미디어월 (사진: 윤준식 편집장)

지난 6월 6일, 이런저런 이유 3가지로 서울 대학로 나들이 일정을 잡았다. 당근 거래와 연극 감상, 미디어아트 감상 이 3가지 일정을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압축해 잡은 건데, 이렇게 일정을 잡게 된 건 정말 우연이지만 3가지 용무 모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특정 장소를 끼고 있어서다.

처음엔 "이게 되겠어?"하는 생각으로 일정을 조정해 보았는데, 우연치곤 너무 기가 막힐 정도로 시간대가 딱딱 맞아주어 뭔가 재미난 일을 기대하며 이날을 기다렸다. 지나치게 일정을 압축해서인지 시간을 맞추려 달리고 달리는 반나절을 보냈다고나 할까? 그래도 미디어아트 감상은 가장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 감상을 통해 마로니에 공원이 지닌 상징성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 누릴 수 있었다.

지금 소개하려는 미디어아트는 전시보다는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아르코미술관에서도 마로니에 공원 쪽에 있는 전시관인 '공간열림 테라스'에서 진행되었는데, 전시관 바깥에 공중전화 박스와 유사한 폐쇄된 투명 아크릴 부스를 만들고 그 안에서 VR 장비를 통해 15분 조금 안되는 VR 영상을 감상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속삭이는 대지_VR부스 (사진: 윤준식 편집장)


VR영상을 구현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탁 트인 야외에서 머리에 착용하는 VR 장비로 봐야 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저런 폐쇄된 공간에서 VR 장비를 뒤집어 쓰고 뭔가 심각해 하거나 헤벌쭉하는 나의 무방비한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거나, 혹에라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즐거워 촬영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온한 상상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작가의 의도를 알고자 한다면 작품을 감상한 후에라야 가능할테니 용기를 내어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 진행자가 들어와 VR 장비를 맞춰주고 아크릴 문을 닫고 나가고 나니, 그때부터 본격적인 나만의 전시가 시작됐다.

영상은 360도 VR이었다. 처음에는 전방만 응시했지만, 귀로 들어오는 바람소리, 바람에 풀이 스치는 소리, 조용한 독백이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전후좌우, 하늘 위와 땅 아래를 살피게 되었다.

사실 이번 '속삭이는 대지'는 미디어아트를 기획한 이미영 감독의 전작 '초토화작전'에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 '초토화작전'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군에 의한 폭격으로 이루어졌던 민간인 희생을 다루었던 문제작이었다.

'속삭이는 대지'에서는 1.4후퇴 당시 벌어진 민간인 희생지 두 군데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1951년 1월 5일, 강원도 홍천-횡성 사이의 삼마치고개 폭격 사건, 1월 20일 충북 단양 곡계굴 폭격 사건이 일어난 장소다.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과 로켓, 네이팜 공격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 두 장소는 이후의 조사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졌고,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 사건이 있었음을 알리는 푯말만 남아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피난민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고, 땅이 얼어붙어 바로 매장을 할 수 없었던 탓에 근처에서 겨울을 나며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매장하고 장례를 치렀다 한다.

VR 영상의 시선은 지표면의 높이에서 출발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샷이냐?"라고 할 뻔했지만, 이는 가이아 가설과 유사한 스토리텔링 때문이라고 할까? 미디어아트의 시놉시스와 취지를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70여 년의 시간 동안, 집단매장지에 묻힌 희생자들의 유해는 분해되어 진토되었다. 기다란 실 모양의 거대한 연결망인 균사는, 생명들을 분해시키고, 숲 지하의 모든 방향으로 자라 일대의 식물들과 상호 연결되어 인간의 신경회로처럼 전기 자극을 통해 식물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홍천 삼마치고개와 단양곡계굴 일대 대지의 식물들이 균사를 따라 생성하는 전기적 파동을 측정하여 이 파동들을 음표로 옮기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식물음악 작업을 통해 역사, 생태, 예술이 관계 맺는 또 하나의 방식과 가능성을 실험했다.

나의 감상은 작가의 시선과는 다른 감상이다. 카메라가 바라보는 경치는 폭격의 피해를 피해 납작 엎드린 자의 시선이었다. 폭격 당시 피난민이 바라보았을 세상의 모습이 이런 장면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바람 소리, 풀잎의 소리, 속삭이는 듯한 독백들은 15분 내내 내게 공포감과 긴장감을 가져왔다.

순간 24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6.25 경험담이 떠올랐다. 강원도 홍천이 고향이었던 할머니는 6.25 전쟁 중 3번이나 피난길에 올랐다. 1.4후퇴 때 이야기하시면서 비행기로부터 폭격 당했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이미 제공권을 UN군이 장악한 상황 속에서 누가 피난민을 폭격한단 말인가?

후일 알게 되었지만, 1.4후퇴 당시의 혼란 속에서 피난민 행렬로 가장한 중공군 남하를 염려했던 거다. 중공군은 참전 초기부터 UN군의 정찰과 정보망을 속이며 신출귀몰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피난민 행렬 속에 첩보원이나 특수부대가 숨어들어 함께 남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3번의 피난길 중에서 한 번은 급속도로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피난이 저지되어 돌아가야 했고, 국군에 의해서도 이대로 내려가다 다 죽을 수 있다고 피난길을 제지 당해 돌아간 적도 있었다고 하셨다. 전쟁 발발 74년을 넘어가며 전쟁의 상흔을 증언해줄 생존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 살아계신 분들은 유소년 시기에 전쟁을 겪은 분들 뿐이다.

영상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투명 아크릴 부스 바깥의 소리가 서서히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로니에 공원을 즐기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소리. 버스킹하는 가수의 목소리, 저 멀리 지나가는 버스의 소음... 눈 앞에 펼쳐지는 70년 전의 흔적과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서 있는 장소가 겹쳐지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 속을 오갔다. 그제서야 왜 야외 부스를 설치해 그 장소에서 VR을 체험하게 했는지 감독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6.25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화하고 있다. 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은 여전한 가운데, 남북한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유화적인 시각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밝혀진 역사적 진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전쟁을 먼저 시작한 건 북한이다. 그러나 전쟁의 과정 속에선 모두가 가해자가 된다. 반공주의에만 골몰해 국군과 우방국의 전쟁범죄를 눈감아도 안 되며, 갈등을 피해보려 전쟁의 원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우방을 적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정확한 명칭도 없다. 남한에서만도 6.25, 6.25사변, 한국전쟁, 6.25동란 등 다양하게 일컫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의미를 정리해 정확히 명명하려 하지 않는다. 평화가 오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도 필요하다. 망각하지 않으려는 이미영 감독의 노력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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