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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읽어보기(2)] 소년이 온다: 양심의 소리, 소년을 기억하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4.10.18 01:24 의견 0

시대적 배경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이어진 무도한 신군부의 암울했던 군정기이다. 작가는 이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광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해, 왜곡된 정보만 알고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작가처럼 조금 과장된 정보를 안타깝게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둘 다 진실은 아니다. 작가는 광주 이야기와 이후 벌어진 암울한 우리 정치사를 다루면서 ‘기억’을 강조한다. “소년이 온다”는 죽은 자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국가의 총이 어린 소년을 하늘로 보내버렸다. 그 소년이 온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반어법이다. 작가의 말은 “소년을 기억하자!”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통념적으로는 살아있다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작가는 살아있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한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숨 쉬고 있는 게 치욕이다. 내 가족이 죽었고, 내 친구가 죽었고, 내 동료가 죽었다. 그런데 나는 살아 남아있다. 슬픔, 애환, 비통함, 분노가 그의 삶과 생활을 뒤덮을 것이다. 그런데 왜 치욕이 덧붙여졌을까? 그것은 슬픔과 비통함도 분노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억울함을 그들은 안고, 총을 든 군인 앞에 굴욕적으로 무릎 꿇어야만 했다. 그러니 치욕스러운 것이다.

자유를 잃은 시민은 어떤 힘도 모으지 못하고 거대한 권력의 폭력 앞에 숨죽여야만 했다. 작가는 암울하게 이 시기를 덤덤하게 작성해 나간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감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동요할 수 없었다. 동요는 곧 사회로부터 격리였으니까. 강제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거짓 자백을 받아 내는 군인들의 탈인성적 행위는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감당할 게 아니었다.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인간은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의 안녕과 번영을 돕고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사람들의 필요가 국가를 발명했다. 물론 고대국가와 현대국가를 비교한다면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국가의 개념도 점차 발전해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별도로 백성을 잘 보살피고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와 현재를 포함해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일부는 그렇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1961년 제3공화국부터 1987년 새로운 헌법이 다시 개정될 때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기간, 국가는 국가가 아니었다. 쉬운 개념으로 이야기해 보자. 가정에는 부모와 자녀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가족 구성원이라고 하고, 여기에 무게를 실어 ‘최소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부모는 당연히 자녀를 돌보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에게 매일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유린한다면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그런 부모에 맞서 자녀들이 저항한다면, 그 가족을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게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라고 할 수 없다. 자녀라고 할 수 없다.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을 쐈다. 그리고 탱크를 몰고 가 밀어버리려 한다. 그래도 부모라면, 자녀의 불순종을 한 번 정도 봐줄 수 있는데, 국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시 저항할 것을 대비해, 그 싹을 짓밟아 으깨 놓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뿌리마저 송두리째 뽑아 버리려 했다. 박정희의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 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들은 국민을 사람으로 본 게 아니다. 이들은 국가 존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을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사람들이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와 군인이 오히려 국민을 향해 발포한다. 너희들이 적이라고... 이제 국가도 없다. 그렇기에 저항은 당연하며, 아무리 저항의 뿌리를 뽑으려 해도, 뿌리는 계속 생명력을 유지한다. 총칼의 겁박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뿌리는 다시 살아나고 싹을 틔우고 줄기를 키워낸다. 그러나 기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다시 국가의 모습을 찾기까지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작가는 이 기간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한다.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 십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작가는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영감을 얻은 게 확실하다. 원전 사고로 인해 평생, 그리고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 고통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광주 출신인 작가는 1980년 이후의 고통으로 대입시켰다. 대한민국의 군정기를 구소련의 가짜 국가 놀이에 비유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질문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긴 힘들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떠올려 보자. 그는 다정한 아빠였고, 그럭저럭 괜찮은 이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직업은 인종 청소였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 연구했다. 그는 변명했다. 단지 상부의 명령이었다고.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아이히만을 통해서 보여줬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악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201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에서 상부의 명령에 철저하게 움직이는 한 장교를 통해,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잔인성과 순응성을 보여줬다. 한강은 우리가 근현대사의 암울한 시대를 지났어도 여전히 유효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 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이 질문에 답은 이미 정리되어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사고하지 않으면 누구나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 성선설, 성악설로 명쾌하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사고를 멈추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잔인하게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변명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양심, 인간의 마지막 보루

작가는 국가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고, 인간 본성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원래 작품은 그렇게 끝났어야 한다. 굳이 해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작가는 소망을 품고 싶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양심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이다. 양심이 있어야 죄책감이 생기고, 고마움을 느끼고, 미안함도 느끼고 과거를 반성할 수 있다. 그 양심은 단편적 교육에서 오는 게 아니다. 양심은 인간에 대한 고찰이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민이다.

총과 칼을 쥐고 있는 군인들을 향해 선량한 시민을 폭도라고 왜곡하여 기꺼이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명령을 내렸을 때, 양심은 말한다. 저들은 시민이다. 군인은 저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면, 수백 명의 광주 시민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 유가족의 슬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동서로 나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추정일 뿐이다. 또 다른 명령이 인간의 사고를 마비시켜서 시비를 따지지 못하게 했을지 모른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작가는 인간의 조건에 양심이라는 보석, 보석이 우리 머릿속에 박혀서 빛나기를 기대한다.

◆덧붙여서

작품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암울했던 시기를 다뤘다. 그런데, 현재는 다른가? 우리는 덜 비호감 대통령, 덜 비호감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뭔가 잘해줄 거 같은 사람을 내 손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덜 못할 것 같은 자들을 우리의 대표로 뽑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정치권력 개편, 혹은 혁명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그 가운데서 더 잘 살 거라는 멘트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부자가 타고 다니는 외제차를 부러워하면서, 나도 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남는 건 신용불량이고. 무소불위해 보이는 5년 권력은 무책임함을 남발했다.

언제부터 정치는 복수를 위한 도구가 됐다. 상생과 공생을 위한 협치가 아닌, 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파멸시키려 하는 총칼이 되어 버렸다. 암울한 30년을 지나, 또 다른 암울한 시기를 국민은 견디고 있다.

과거에는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일어났던 민중이 이제는 편리와 더 잘 수 있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대로 눌러 앉아있다. 현세대의 양심의 소리가 어느 시점에 확성기를 통해 전달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대한민국의 제2의 암흑기를 맞이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심이 소리가 퍼지지 않으면, 암흑기는 더 오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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