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긴 서론: 내가 유현목 감독을 알게 된 건

내가 유현목 감독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건 고3 때였다. 담임이던 최창규 선생님이셨는데,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78학번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모교 자랑을 하시면서 몇몇 인물을 언급하셨는데, 하희라, 채시라, 마지막으로 유현목 감독이었다.

배우 하희라, 채시라는 나의 학창시절 책받침과 연습장 표지로 많이 만나던 연예인들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유현목 감독은 누구? 왜?’하는 의문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인터넷과 온라인 아카이브가 없었던 관계로 유현목 감독이 누구인지, 그의 작품이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당시 고교 국어교사들은 대부분 구라쟁이들인데다, 별명 또한 자칭 ‘최뻥규’였던지라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좀 더 세월이 흘러 포털사이트에서 감독의 신상과 필모그래피 정도만 아는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유현목 감독을 만나게 된 건, 그가 남긴 저서 덕분이었다. 그것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2019년에 말이다. 2019년은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로, 이를 기념하는 행사와 여러 가지 콘텐츠들이 나오던 때다. 나도 마찬가지로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낑낑대고 있었는데, 답답한 마음에 헌책방에 갔다가 발견한 책이 『한국영화발달사』(1997)였다.

필자와 유현목 감독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 그의 저서 <한국영화발달사>


이 책에는 한국영화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현대 한국영화가 등장하기까지의 내용들이 매우 적절하면서도 명료한 서술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지금은 소실되어 볼 수 없는 영화들의 작품성과 감독, 촬영감독의 작가론까지 다루고 있어 ‘작품을 보지 않았음에도 작품을 본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대체 이런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이 누구야?”라고 하며 그때야 비로소 저자명을 들여다보니 ‘유현목 감독’이었다.

그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긴 했지만,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영화사를 정리하는 고된 작업을 감내했다는 것과 쉽게 읽히는 글을 써내는 지적 작업에 반해버렸고, 1980년에 초판을 낸 것에 만족하지 않고 1997년까지 2번의 개정판을 더 내는 끈기에 존경심이 싹텄다.

감독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때가 1992년이었으니, 27년만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이후 「한국영화아카이브」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의 대표작 『오발탄』(1961)을 감상했고, 사실주의에 입각한 디테일한 설정,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서울의 풍경-특히 청계천 장면-에 옛날 영화의 지루함은 뒤로 하게 되었고, 전후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개연성으로서 연출한 총격씬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후로 또 유현목 감독을 잊고 지냈는데, 2025년 들어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와 소소한 소식을 들으며, 나홀로 그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업을 해 보았다. 유현목 감독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정리하는 것은 물론, 나만의 셀렉션으로서 당대의 희극배우 구봉서를 주연으로 한 리얼리즘 영화 『수학여행』(1969)을 감상하는 일이었다.

영화 <오발탄>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1. 실향민에서 국민 감독으로: 삶이 곧 영화였던 사람

192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2009년 서울에서 뇌졸중으로 별세하기까지, 유현목의 84년 생애는 20세기 한국사의 축약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과 월남, 산업화와 민주화 등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그에게 영화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생존과 증언의 수단이었다.

부인 박근자 여사 인터뷰 기사를 보면, 감독은 잠결에도 “레디! 액션!”을 외치고 새벽에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연출 연습을 할 정도로 영화에 몰입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을 할 거야”라는 입버릇도 있었다고 하니, 삶 자체가 영화, 영화감독인 사람이었다.

영화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 즈음 영화인들이 삼선교 집에 모이곤 해서 늘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는데, 그 속에서도 책을 들고 한구석에서 독서하는 학구파였다. 이밖에 영화인들을 자주 만났던 명동의 맥주홀 「25시」에서도 항상 열띤 토론 속에 핏대를 세우며 자신의 영화사상을 피력하는 통에 ‘백발홍안’, ‘유핏대’같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특히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오발탄』(1961) 제작에 얽힌 사연은 존경심이 우러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제작비 부족으로 초가집 사랑방에 얹혀살면서도, 벽면을 콘티와 설계도로 가득 채웠고, 모든 장면의 리듬까지 세밀하게 계획했다고 한다.

영화 <말미잘> 현장사진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소장자료)


2. 영상적 사유의 개척자: 말보다 이미지로 말하는 감독

유현목이 남긴 어록 중에 “영상적으로 사유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국 감독들이 글쓰기를 기피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한국영화발달사』(1980) 저술을 통해 민족영화의 정신을 이끌어왔던 선인들의 작가주의와 영화작품에 표출된 세계관을 역사적으로 정립하려 했다. 그가 지닌 학구적 열정 덕분이기도 한데,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이런 작업은 그가 기능인이 아닌 지적 탐구를 추구하는 사상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유럽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도 각별했다. 그 영향으로 잉마르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이는 『순교자』(1965), 『사람의 아들(1981)』 등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구현되었다. 실제로 목사가 되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동국대 국문과로 진로를 바꾼 젊은 시절의 사연도 있는데, 이는 영화 속에 기독교적 회의와 구원에 대한 탐색으로 스며들었다.

시각적 미학의 추구 또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독일 표현주의를 한국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독창성을 보여줬다. 『오발탄』(1961)에서 보여준 청계천의 음울한 풍경, 『순교자』(1965)의 종교적 상징들, 『춘몽』(1965)의 파격적 실험들은 “대사보다 미장센으로”, “설명보다 구도로” 말하고자 했던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시각적 사유는 분단과 전쟁으로 상처받은 현실을 직설적으로 고발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제약-특히 독재와 반공주의로 인한-과도 관계가 깊다.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은유와 상징을 통한 우회적 전략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 <춘몽>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3. 장르를 넘나든 실험가

한편 유현목을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실제로 유현목 감독은 리얼리즘만이 아닌 모든 장르의 영화에 도전했다. 심지어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주가 되는 반공영화조차도 훌륭한 원작을 토대로 한 명작영화로 승화시켰다. 애니메이션 분야에도 관심을 드러냈다. 김청기 감독의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1976)의 제작자가 유현목 감독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감독의 일상 에피소드 중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코믹한 면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한다. “나는 심각파 감독이 아니라, 알고 보면 재미있는 사람”이라 인정받으려 했다고 한다. 덕택에 1960년대 후반 『공처가 삼대』(1967), 『몽땅 드릴까요』(1968), 『수학여행』(1969) 등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공처가 삼대』(1967),에서 보여준 성 대결과 세대갈등 같은 유쾌한 풍자, 『몽땅 드릴까요』(1968)의 배우들의 코믹한 앙상블은 또 다른 감독의 일면을 보여준다. 또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근대화 프로젝트를 본격화하며 문화예술을 통제하던 시기 속에서도, 코미디 장르를 활용해 자기만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르별로 유현목의 대표작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리얼리즘: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②종교영화: 『순교자』(1966), 『사람의 아들』(1981)
③실험영화: 『춘몽』(1965), 『손』(1966)
④코미디: 『공처가 삼대』(1967), 『몽땅 드릴까요』(1968), 『수학여행』(1969)
⑤공포영화: 『한』(1967), 『한 2』(1968)
⑥사극: 『임꺽정』(1961), 『성웅 이순신』(1962)
⑦반공영화: 『카인의 후예』(1968), 『악몽』(1968), 『나도 인간이 되련다』(1969)

영화 <공처가삼대>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4. 모순과 갈등 속에서: 반공법에 맞서면서 반공영화를 만든 감독

유현목의 복합적인 면모는 이념적 갈등에서 드러난다. 1965년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 당시, “반공이 국시가 아니라 자유가 국시”라며 이만희를 적극 변호하다 기소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1968년 이후 『카인의 후예』(1968), 『악몽』(1968) 등 여러 편의 반공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지만 유현목의 반공영화는 개인적 체험과 시대적 요구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었다. 자신도 분단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 그가 겪은 전후의 황폐한 현실은 『오발탄』(1961)을 통해 폐쇄적인 분열성으로 터져나왔다. 한편으로는 이만희 감독을 옹호하다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반공영화를 제작하며 타협을 본 것이기도 했다.

후기작 『장마』(1979)는 이런 분열적 행보가 정점에 달한다. 두 가족의 갈등으로 전쟁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재현하면서,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갈등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남고, 분단의 역사를 살아내야 하는 남은 이들의 슬픔을 표현했다.

영화 <카인의후예>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5. 영화 생태계 조성자

유현목의 위대함은 개인 작품을 통한 성취를 넘어 한국영화 전체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데 있다. 감독이면서 동시에 교육자, 운동가, 제작자였기 때문이다.

1964년 「시네포엠」 창립으로 시작된 그의 실험영화 운동은 1970년대 「카이두 실험영화 클럽」 지원, 「동서영화연구회」 발족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성일, 강한섭, 전양준 등 한국 영화비평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1972년에는 「유프로덕션」을 설립하며 제작자로 나섰다. 이유는 후배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문화영화, 애니메이션 제작을 통해 영화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앞서 언급했듯 『로보트 태권V』(1976) 제작에도 참여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또 1976~1991년까지 15년간 모교인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체계적인 영화 교육의 토대를 구축하기도 했다.

제작자로 참여한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거북선>

6.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유

한국영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는 지금, 한국영화는 시대와 대화하고 있는가? 상업적 성공 너머의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영화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가?

감독은 리얼리즘의 대가로 인정받았지만 자신의 명성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실험영화에 도전했고, 문예영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코미디와 공포영화까지 시도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실험 정신은 오늘날 한국영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원동력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유현목은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개인적 표현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시대를 증언하고 사회를 성찰하는 지적 도구로 활용했다. 분단 현실, 전후 복구, 산업화의 그늘 등 항상 동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혀 왔다. 이는 앞으로도 영화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교육, 제작, 운동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과 기여는 지속가능한 영화산업을 위한 모범이기 때문이다.

유현목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그가 지닌 실험 정신의 계승, 영화의 사회적 책임 의식, 한국영화 생태계 기여 등을 되새기며 한국영화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물론, 유현목 외에도 여러 거장들을 계속해서 기념하게 될 것이다.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그려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