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호 씨는 지난해 8월, 강원도 철원에서 K-9자주포에 탑승해 훈련을 받던 도중 기계 오작동에서 비롯된 폭발사고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찬호 씨 본인을 포함, 동승했던 7명의 장병 중 4명은 세상을 떠났고, 배우가 꿈이었던 찬호 씨는 사고로 인해 자신의 꿈을 무기한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기사의 후속기사입니다.
[9월 2일]“얼마나 더 희생을 해야 군대가 바뀔까요 전쟁도 안 났는데 사망자가 계속 나오고 있어요.”
폭발사고 후 후송이 이루어지기까지 훈련장에 바닥에 장시간 방치된 것은 물론, 군병원조차도 중증 화상환자 여럿을 동시에 보살필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부족한 상황 속에 놓여있었습니다. 함께 후송된 다른 병사 한 명이 군병원 병실에서 목숨을 잃고 나서야 이찬호씨는 화상전문센터가 있는 지금의 입원 병동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폭발 사고가 터지고 만 하루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쳐 살릴 수 있는 생명을 놓친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던지게 하는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부의 대응은 참담한 수준이었습니다. 이찬호 씨의 설명에 따르면 최초 6개월간은 식비 등의 명목으로 소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후엔 사실상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취재진에게 군복무 중 발생된 사고에 대한 처우가, 일반 기업의 산재 처리만도 못하다고 토로했습니다.
▲ 30만 시민의 청원이 있었지만... ⓒ편집부
|
관련자들의 태도도 문제였습니다. 찬호 씨의 사연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며 30만 명이라는 국민이 서명에 참여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습니다. 심지어 해당 청원에 답변한 청와대의 동영상은 해당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문제 해결의 의지는 있는지 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해당 청원에 대한 브리핑과 답변에 임하면서도 피식피식 웃는 등 경솔한 태도를 보이는 등 비판의 여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청와대 청원 이후 몇몇 고위 관계자도 병실을 찾았지만 ‘언론 플레이’에 가까웠습니다. 심지어 보훈 대상자 신청 과정 역시, 보훈 당국에서 안내해주지 않아 찬호 씨 본인이 포털 사이트 검색을 참고해 하나하나 알아보며 신청해야 했습니다.
▲ 한화지상방산 홈페이지에 올라온 K-9의 이미지. 전 세계에 수출되는 명품무기라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매출액 7,700억원의 기업으로 K-9은 한화지상방산의 효자상품이다. 그러나 사고 장병에 대한 보상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 ⓒ 한화지상방산 홈페이지
|
‘네X버 치면 나온다’더니…
연락 닿지 않는 한화지상방산, 답변 없는 정부
수 개월의 시간이 다시 경과됐지만 보상 및 유공자 지정 여부 등에 대하여 정부는 여전히 “기다리라”는 답변만 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의 자주포를 생산하여 책임 소지가 상당한 한화지상방산의 경우, 대표가 찬호 씨의 병상을 찾아와 위로를 전했지만 해당 문제에 대한 보상 및 합의 등 책임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연락하면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여 찬호씨가 동석한 관계자에게 명함을 요청했는데, 명함을 건네는 대신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번호가 나온다”는 말만 남겨놓고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병문안 자체가 비난 여론 종식용이 아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설령 검색을 통하여 번호를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행동은 피해자에 대한 예우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검색으로 확인된 한화지상방산의 연락번호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확인을 위해 시사N라이프 강동희 기자가 평일 낮 시간대에 20차례나 통화 시도를 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만일 저희 시사N라이프과는 인연이 아니라 연락이 닿지 않은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한화지상방산은 이찬호 씨에게 연락하여 한화지상방산 대표 직통번호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 K-9 자주포 사고 희생자 위령비 ⓒ 이찬호 페이스북호
|
사고 나도 입증 책임은 본인에게…
보훈체계 문제점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
시사N라이프는 전문가의 견해를 참고하기 위해 군 인권센터 측에 전화문의를 진행했습니다. 사무국 B 간사님과의 통화를 통해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대한민국 보훈체계의 문제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군에서의 사고 발생시 입증책임은 병사 본인에게 있다고 합니다. 설령 입증을 하더라도 공상책임은 자대에서, 보훈은 보훈처에서, 순직은 각 군 본부에서 담당하고 있어 보훈체계의 연계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찬호 씨의 사례와는 다르지만, 군에서 얻은 희귀병, 난치병, 암 등은 입증이 어려워 보훈 비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국가가 사고의 원인을 K-9자주포 때문이라 입증해 주었지만, 제조사인 한화지상방산 측에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군 인권센터는 다른 사례를 통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는데요,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대에서 가스렌지 폭발로 중상을 입은 취사병이 있다면, 이 경우 가스렌지가 원인이기 때문에 중상을 입었다 해도 군에서 보상받는 게 아니라 가스렌지 회사에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스렌지 회사에게 보상을 청구해도 기업이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개인 손배송을 해서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경우도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에 따르는 법무 비용도 병사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한화지상방산과 같은 방산업체 대부분은 대기업이며 이런 대기업은 자체 법무팀은 물론, 다수의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무법인과 거래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월급 수십 만원도 되지 않는 일개 병사가 치료와 재활, 생업을 내려놓고 이런 대기업을 상대로 장기간의 소송을 진행할 수 있을까요 왜 국방부와 군대가 군법무관을 동원해 함께 맞서지 않는 것일까요 공상처리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와 같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것일까요
또한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바, 보훈대상 및 국가유공자신청 등등의 절차 안내 역시 군인권센터가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지금 언급하고 있는 군인권센터는 국가기관이 아닌 시민단체입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한 이들의 명예와 보상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시민들이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대규모 조직과 예산을 갖고 있는 보훈처는 제대로 일하고 있는거 맞습니까
▲ 무사히 회복 중인 자신의 모습을 페이스북에 드러낸 이찬호 씨 ⓒ 이찬호 페이스북
|
자서전 출간한 이찬호 씨-“괜찮아 돌아갈 수 없어도”
수익전액 화상환자와 소방관에게 기부
한편 지난 9월 시사N라이프의 보도 이후, 이찬호 씨에 대한 언론의 태도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찬호 씨의 흉터, 물리치료를 받는 찬호 씨의 모습 등 보여주기 식 보도, 선정적 보도에 골몰하던 상당수 언론들이 논조를 바꾼 것입니다.
사실 시사N라이프가 찬호 씨를 취재하겠다고 나선 계기가 상당수 언론이 보인 노골적인 태도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뷰이의 절박한 상황을 소재로 시청률과 구독률을 끌어 올리겠다는 욕심만 보이는 ‘고통의 포르노’, ‘공분의 포르노’를 여기서 중단시켜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시사N라이프는 영상인터뷰를 통해 찬호 씨의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고, 찬호 씨는 저희의 마음을 알아주었습니다.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상황과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전해 주었습니다. 시사N라이프의 보도를 계기로 각종 언론들도 진정성있게 논조를 전환했다. 매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려는게 아니라 우선 찬호 씨의 이야기를 들으려했고, 여과없이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찬호 씨는 자신의 근황을 페이스북을 통해 전해 왔습니다. 사진을 통해 한층 밝아진 모습과 “당신의 흉터를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12월 초에는 그간의 일들을 담은 자서전 <괜찮아 돌아갈 수 없어도>를 출간했고, 수익금 전액은 화상환자와 소방관들에게 전액기부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찬호 씨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스런 여정 가운데서도 굳건히 자신을 회복해 가는 찬호 씨에게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시사N라이프가 기다리는 소식은 이런 소식이 아닙니다. 군 복무 중 사망하거나 공상을 당한 자들에게 정부와 방산기업이 장병들의 명예를 지켜 예우를 강화하고, 유족과 생존자의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정당한 보상행위에 임한다는 소식입니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하라고 국민은 납세의 의무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더 이상 ‘졸(卒)’로 보지 않도록 계속해서 지켜보겠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취재: 강동희 기자 / 윤준식 기자]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