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작가의 3.1혁명(11)] 임시정부, 불안한 시작
이동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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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09:43 | 최종 수정 2019.07.04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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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는 4월 11일에 조직되었습니다. 이미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연해주와 경성에는 임시정부와 비슷한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서울에는 한성정부가 있었고, 연해주에는 연해주 정부가 구성되어 있었죠. 이후 통합된 상해임시정부는 여러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새로 출범합니다. 실질적으로 임시정부가 활동을 개시한 시기는 3개의 정부가 통합된 이후인 9월부터입니다.
또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과정에서 이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 중에서는 상해임시정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나머지 연해주로 돌아가는 이들도 등장합니다. 일부 세력은 상해에 남아 임시정부를 꾸려갑니다. 그 들 중 한명이 바로 이동휘입니다. 이동휘는 5편인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다 (http://www.sisa-n.com/27159)>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 왼쪽부터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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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는 과거 기독교 신자로 전도사까지 활동을 했었지만 1918년 돌연 사회주의자가 됩니다. 1910년 10월 혁명이후 러시아가 공산주의사회로 돌아서면서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고 각 민족의 독립운동을 돕기 시작합니다. 1918년 한인사회단이 결성되면서 독립지사들 중에는 사회주의자가 많이 발생하죠. 이들은 러시아의 재정적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념적 부분부터 갈등의 조짐을 보입니다.
9월에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한 이후 11월부터 본격 통합 정부가 운영되는데, 처음에 상해임시정부는 스위스식의 국민 대표를 뽑아 의원내각제로 운영됩니다. 국회는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후 새로 통합된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로 개헌합니다. 임시정부는 총 5번의 개헌을 진행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라 주장하면서 헌법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흩어진 3개의 정부를 통합하면서 정부 뿐 아니라 인사도 통합해야 했죠. 연해주 인사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는 이승만이, 그 뒤를 이어 이동휘가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 배후에 이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던 도산 안창호가 있었죠.
▲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유적지기념관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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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처음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할 당시에는 외국에 있었으나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합니다. 서로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타협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운 이유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외교를 통해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거죠. 이승만은 과거 유학생활을 통해 윌슨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윌슨대통령이 과거 이승만이 유학했던 대학의 총장이었기 때문이죠.
윌슨과 이승만이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외교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이승만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를 중심으로 국내외 민족지사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기면서 임시정부는 9월 11월 사이에 개편을 겪고 난 뒤 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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