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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13)] 세종대왕과 연구기관 집현전

시사-N 승인 2018.03.07 11:42 의견 0
경복궁 안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도 널리 알려진 집현전도 있습니다.

 

원래 집현전은 고려시대 인종 대에 설치된 왕실의 연구기관이지만 설립만 되었을 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세종 때가 되어서야 규모와 기능이 확대되었습니다. 세종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학자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경연과 서연입니다. 경연은 왕과 신하가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것이고 서연은 장차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과거 시험을 감독하는 시험관으로도 활약했으며 책을 보관하고 실록을 쓰는 일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집현전은 세조 대에 와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조가 단종을 내리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세조는 세조를 지지하지 않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는 세력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당시 단종을 지지하던 사육신, 생육신들은 집현전에서 활동하던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집현전을 없애버렸고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수정전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정전을 통해 집현전의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 집현전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수정전의 모습

(사진출처 : 경복궁 홈페이지)

집현전 : 세종대왕 정치의 중심

 

현재의 수정전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당시의 건물입니다. 이 건물을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세조 때는 예문관으로 사용했고, 19세기 말에는 갑오개혁의 중추였던 군국기무처가 들어섰습니다.

 

세종대왕 당시의 집현전은 정치의 중심이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며 왕과 주요 정책을 논의하고,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1997년 훈민정음 혜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건물의 이름이 변경될 때마다 쓰임의 용도도 변해 예문관 때는 왕실 장례행사와 사초작성, 군국기무처로 활용되었을 때는 국가 개혁위원회로 사용되었습니다.

 

♣tip대부분 경복궁 답사의 마지막을 수정전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곤 합니다. 세종대왕 당시 정치 중심이었던 집현전을 떠올리며 1만원 지폐를 꺼내 세종대왕 사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겨보면 어떨까요.[이재권 / 한누리역사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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