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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12) - PC 한 대 가격은 거의 승용차 한 대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7.08 09:00 의견 0

▲ 당시 모스크바 소프트웨어 전시회 모습. ⓒ 주동식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당시 소프트웨어 전시회는 무척 소박한 규모였던 것 같다. 미국의 컴덱스쑈나 한국에서도 자주 열리는 IT관련 전시회에 비하면 그랬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래도 여기저기 부스를 돌아다니며 명함이나 카탈로그, 브로셔 등을 챙겼다. 최소한 이들 업체만이라도 만나봐야지물론 대화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디알로그사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들은 얘기는 꽤 재미있었다. 지금 상세한 내용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지만, 대충 떠오른 얘기들이 있다.

디알로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자신들의역량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디알로그사의 역량이 아니라 쏘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전반을 대표하는 자부심이었다.

“칠판과 분필만 갖고 하는 작업에서는 전세계 어느 나라 엔지니어들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하드웨어가 부족할 뿐이죠.”

, 수학 실력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었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본 소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정작 PC 한 대를 구입하기도 어려워서 제대로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한탄이었다. 디알로그 엔지니어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당시 쏘련에서 PC 한 대 가격은 거의 승용차 한 대 가격과 비슷하다는 얘기였다.

디알로그 엔지니어가 건네준 자사 소프트웨어 제품의 소스코드를 살펴본 선경의 C차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 친구들이 소스코드까지 줬는데도 그 알고리듬을 이해하기 어렵네요. 정말 특이한, 우리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알고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좀더 연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꼭 디알로그사의 제품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특히 화상 인식의 경우에는 매우 탁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미국과의 군사력 경쟁의 산물이긴 할 텐데, 인공위성을 통한 화상 이미지의 정련과 해석은 다른 나라가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이것은 쏘련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에게서 들은 얘기이니,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엔지니어들은 또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가 내 기억에 흔적을 남긴 것은 그 뒤 서울 시내 길거리에서 흔하게 팔렸던 망원경 제품들이 러시아에서 온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때문일 것이다. 그 망원경들이 내게쏘련의 막강한 화상 이미지 처리 기술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 쏘련의 엔지니어들은 해외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대로 돈 주고 사기가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에 락(lock)을 푸는 기술이 굉장히 탁월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결코 자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얘기지만, 이들에게는 이것도 나름 자신들의실력을 입증하는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다른 나라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자신들의 패키지에 아무리 뛰어난 락을 걸어도 그 제품이 우리 손에만 들어오면 순식간에 락을 풀 수 있습니다. 한번 풀면, 그 다음에는 다들 사이 좋게 나눠 갖고 사용해보죠.”

쏘련이 컴퓨터 CPU를 만든 적이 있다는 얘기도 모스크바에서 처음 들었다. 아마 국가 연구소에서 미국의 컴퓨터 CPU를 대체한다는 취지로 만든 모양인데, 성능 여부를 떠나 일반 컴퓨터 기기에 적용조차 못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원칙때문이었다.

“쏘련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산업 생산에서도 국제표준을 준수합니다. 길이의 국제표준은 미터 단위 아닙니까 그래서 쏘련의 컴퓨터 CPU 역시 미터 단위 기반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미국의 CPU들은 모두 인치를 기반으로 만들었더군요. 문제는 전세계 컴퓨터 시장에서 유통되는 마더보드 등이 모두 미국산 CPU를 기준으로 즉, 인치를 단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CPU는 마더보드에 꽂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하더군요.”

좀 황당한 얘기이고,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쏘련 사회, 쏘련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닌 듯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기는 해도, 내가 디알로그 사무실에서 본 엔지니어들의 근무 분위기는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직원들의 10대 자녀들이 사무실에서 부모와 함께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봤고, 내가 보기에는 중3이나 잘해야 고등학교 1,2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년들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며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도 봤다.

▲ 디알로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소년. 중학생 같은데, 디알로그 관계자들은 저 소년이 ‘일한다’고 말했다. ⓒ 주동식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하면서부터 뭔가 지나치게 비장한 느낌을 계속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비장감은 디알로그 관계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점점 더 심각해졌던 것 같다. 그 비장감의 정체는 별 것이 아니었다.

“아, 우리의 사회주의 조국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었단 말인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고, 대충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 눈으로 보는 쏘련의 현실은 비록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내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 같고, 약간의 과장된 포즈이기는 해도 그런 비장감이 전혀 가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내 그런 표정이 다른 사람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나를 혼자 남겨두고 일행이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B이사가 내게 한마디 건넸다.

D기자, 모스크바 온 뒤부터 표정이 너무 어두운데, 혼자 두고 가기가 좀 걱정이 되네요. 이왕 남는다니 더 권할 수는 없지만, 정말 조심하세요.”

사실 나로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온 뒤로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얼마 전 일본인 사업가가 모스크바에 와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강도로 돌변해 여권과 돈은 말할 것도 없고 팬티까지 완전히 벗겨서 벌거숭이를 만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였다. 당시에도 이미 쏘련에서는마피아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정해진 방침이다. 일행을 떠나 보낸 다음날 나는 통역을 만났다. 이제부터 정말 고난의 행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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