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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15) -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사람들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7.21 09:00 의견 0

▲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성당. ⓒ 주동식

모스크바에서 일요일을 맞아 카메라만 들고 거리로 나섰다.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좀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녀보고 싶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가운데 인상적인 모습이 있었다.

나이가 일흔은 넘어 보이는 동양계 노인이 부인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소한 체구에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까지 든 노인의 입성은 비록 단정하고 깨끗했지만 어딘지 초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눈을 끈 것은 그 초라한 양복이 아니라 그 양복 가슴팍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훈장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해도 제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민간인이 가슴에 그렇게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본 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런 식의 모습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낯설고 의아한 느낌이었지만 노부부를 지나쳐 길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본 모습의 의미가 새삼 가슴에 무겁게 다가왔다.

내가 본 저 모습은 국가 사회의 공식적인 규범체계와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의지해 살아가는 규범이 모순되지 않고 일치한다는 증거 아닐까 , 정부가 인정하는 규범이 그대로 평범한 일반인들의 삶 속에 그대로 수용되고 살아남고 발전한다는 얘기 아닐까 이것은 나로서는 낯선 경험이었고, 사실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내가 30여년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경험에서 정부의 공식적인 규범은 아무리 좋게 봐줘야 그냥 적당히 지키는 시늉만 하면 되는 의무였고 보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지못해 수용해야 하는 일종의 강요였다.

나는 병역 의무를 일종의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었고, 가끔 서양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하는전쟁에 참가하고 싶어서 일부러 나이를 올려 지원하는등의 에피소드는 일종의 변태스러운 행위 또는 실제가 아닌 허구의 묘사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쏘련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본 그 노인의 모습은 나에게 그런 세계 즉, 공동체의 규범과 개인이 실제 의지해 살아가는 규범이 모순되지 않고 사이 좋게 공존하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 노인은 무슨 전쟁에 참가해서 싸운 공로로 저 훈장을 받은 것일까 모르기는 해도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 아닐까 짐작했다. 무슨 전쟁이건, 저 노인에게 그 전쟁의 경험은 자랑스러운 기억이며, 그 자부심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 아닐까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진정으로 부러웠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동체의 가치관이눈에 보이지 않는 강제에 의해 개인에게까지 침투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게 그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 끝내 만나지 못했던 그광장이 이곳 모스크바에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아닌가

쏘련에 들어온 후 쏘련 체제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깔보는 듯한 느낌까지 갖게 되었던 내게 그 노부부의 모습은 이런 점에서 새로운 충격이었다. 나는 모스크바의 거리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비슷한 충격을 연달아 경험해야 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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