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은 무게감 있는 주제를 중저음의 목소리로 전하는 영화입니다. 장면 장면엔 힘이 있고, 감상 후엔 긴 여운이 남지요.
만든 이 소개 자막을 포함해 삼십 분이 넘지 않는 단편이고 내용도 간단합니다.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군대 얘기'죠. 잘 돌아가던 분대에 고문관이 들어오고, 선임은 참다 못해 그를 구타하고. 구타를 당한 고문관은 자해를 하고, 그로 인해 폭력을 행사했던 선임은 처벌 대상이 돼 더 큰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아, 세상에 이보다 뻔한 얘기가 또 있을까요.
그러나 관객들은 작품을 보며 뻔한 내용을 불만하는 대신 '이런 비극이 뻔하게 느껴지는 비극적 현실'에 대해 물음표를 달게 됩니다.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욕설 반, 이야기 반에 중간 중간 폭소 몇 번 터뜨려가며 주고 받을 만한 소재의 이야기지만, 술자리 특유의 해학적 분위기를 걷어내고 덤덤히 풀어내니 이게 새삼 엄청난 비극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익숙한 배경과 익숙한 복장, 익숙한 인물 모두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다 새삼스러울 수밖에요.
그러나 무엇보다 새로운 건 영화의 인물 구도입니다. 보통 이런 영화에선 구타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마련인데, 영화는 일차적인 폭력 가해자인 정철민 병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요. 그리고 그가 얼마나 무게감 있고 책임감 있는 인간인지, 반대로 고문관은 얼마나 맞아 싼 놈인지 설명하는 데 영화의 앞 절반을 할애하고 있지요.
그 덕에 관객들은 영화가 중간 지점에 이르러 참다 폭발한 정철민 병장이 고문관을 마구 때리는 장면이 나오면 군대 내 폭력과 군 가혹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사하는 물리적 폭력을 수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후임병 폭행 어쩌고 하는 죄몫으로 징계를 받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미 심정적으로 정철민 병장의 편이 돼버린 관객들은 정의의 구현이 아닌 또 다른 폭력을 목격하게 되지요.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2차 폭력'입니다. 부조리하고 비효율적인데다 이기적이기까지 한 개인 개인이 모여 구성된 거대 조직 앞에 정의 구현이란 명목으로 희생되는 개인의 무력감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죠. 고문관을 구타한 병장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군대 내 폭력과 가혹행위의 불가피성에 대한 피력이냐 하면 그 정반대인 겁니다. 정철민 병장이 고문관에게 휘두른 폭력은 개인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죠. 그는 군 조직의 부품으로서 그저 자기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직은 마치 꼬리 자르듯 이 문제를 병장 개인과 대대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소외되다 못해 반쯤 시체가 돼버리고 맙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을 개인 문제로 만들려다보니 사실 관계는 당연히 왜곡되고,결국 일련의 사건은 '내무실에 창이 없어서 폭력이 생겼다'는 따위의 허황된 보고서와 내무실에 창을 설치하는 어처구니 없는 해결책으로 종결되고 말지요.
영화는 정철민 병장이 제대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전역 신고를 위해 대대장을 만나고, 전역 신고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문제의 고문관을 만나죠. 그에게 징계를 가했던 대대장은 그로부터 구타 사실을 유도 심문하던 당시와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고문관은 부대를 등지고 돌아서 서 나가려는 그에게 평생 못잊을 고문관 짓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 난리를 치고도, 분대 내 가장 꼭대기와 가장 밑바닥이 모두 그대로인 겁니다.
그런 그들을 등지며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은 정철민 병장입니다. 군 조직은 그대로이고, 훼손된 개인은 그렇게 '사회로 돌아갑니다'. 군조직을 경험한 이든 아니든 정철민 병장의 마지막 대사, '에이 씨'에 공감 못할 관객은 아마 없을 겁니다. 부조리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억압된 분노를 응축하는 대사입니다.
칭찬할 구석이 많지만, 전 각본이 갈등의 점진적 확장을 다루는 방식에 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 분대는 소주에 떡볶이 튀김 등을 곁들여 같은 내무실 막내의 생일을 챙겨줍니다. 분대별 족구 대회도 우승이라네요. 분위기 참 좋습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알죠. '우리 분대엔 창이 없다'는 묵직한 독백으로 시작된 만큼 분대의 즐거운 시간은 앞으로의 파행을 소개하기 위한 포석에 불과하단 사실을요. 애니메이션으로서도 훌륭합니다.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과 생김에 공을 일일이 들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훌륭한 영화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상업적인 한계 탓에 보시고 싶어도 개봉관 찾기가 만만치 않으실 겁니다. 저도 찾다 찾다 포기하고 결국 유료로 내려받아 봤습니다. 지금 독립 영화의 제작 및 개봉 여건에 대한 비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전작 <돼지의 왕>에 이어, 만만치 않은 여건을 딛고 이 정도 작품을 만들어 준 연상호 감독에 대한 경의는 표하고 싶군요. 익숙한 소재를 가지고 삼십분이라는 시간 안에 이 만큼의 여운을 끌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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