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독일 통일(42)] 독일통일을 위한 몸부림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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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8 11:52 | 최종 수정 2019.07.0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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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62년 자민당 대외정책 브레인인 볼프강 숄베르(Wolfgang Schollwer)는 정책보고서 ‘독일문제 구상 : 페어크라머룽과 재통일(Denkschrift zur deutschen Frage, ‘Verklammerung und Wiedervereinigung’)’을 제출하였고, 1967년 다시 정책보고서 ‘독일과 대외정책(Deutschland und Außenpolitik)’을 제출하여 자민당의 사민당과의 연립정부 참여에서 동방정책을 뒷받침하였다.
여기서 그는 동·서독의 재통일과 정치적 연합 포기라는 혁명적인 구상을 제시하였다. 대신 두 개의 독일이 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Verklammerung)로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제안하였다. 여기에는 오데르나이쎄 선의 인정과 동서독 비무장 원칙도 담고 있었다. 이는 평화를 통일보다 우위에 두는 동방정책이었다.
지금까지 자민당은 서독의 유일대표성과 국경선의 유보정책과 기민련/기사연의 민족국가적 해결방식인 독일정책을 지지하였지만 이제 완전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적었다. 서독의 서방으로의 통합, 동독의 소련권으로의 통합은 독일 민족국가에 대한 분명한 거부였다.
자유로운 질서를 가진 독일제국의 중부 독일과 동부 독일의 평화적 통일이 그동안 독일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하지만, 독일과 유럽의 정책 전개는 이를 넘어섰다. 그래서 전 유럽의 항구적인 평화질서 창출과 유럽의 분단 및 독일의 분단 극복이 궁극적 목표이며, 모든 국내 및 대외 정책 노력은 최우선적으로 그 목표 달성에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민련의 지지 기반 중 하나인 개신교와 관련하여 개신교 중립파를 대표하였던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은 서방 지향적 동맹 정책을 도덕적으로 의문시하고, 양 진영 밖에서의 재통일을 추구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1952년 아데나워 총리의 나토 주관 하 서독군 창설 비밀계획인 ‘함메르토 비망록’에 반발하여 하이네만은 장관직을 사임하고 기민련을 탈당했
하이네만은 이후 서독의 재무장은 재통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논리에서 오직 재무장 반대만을 강령으로 내건 전독일인민당(Gesamtdeutsche Volkspartei. GVP)을 창당하였다. 당은 1953년 총선에서 2% 이하의 득표에 머문 후에 해산하고 하이네만을 비롯하여 주도적 당원 대부분이 1957년에 사민당에 가담하였다.
그 후 그는 1969년 3월에 실시된 서독 대통령 선거에서 기민련/기사연의 전 외무장관 슈뢰더(Gehard Schroder) 후보를 1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사민당의 하이네만 연립정부 법무장관을 다음 정부에서 사민당과 연립이 약속된 자민당에 할애한다는 약속 위에서 이루어진 선거였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 해 7월 15일 사민당 빌리 브란트의 측근 에곤 바르(Egon Bahr)가 소련이 승인하지 않는 한 통일은 당분간 불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동독 즉 독일민주공화국의 실체를 인정하자는 ‘접촉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erung)’라는 제목으로 동서독 평화공존을 주장하고 나섰다. 서독 국내에서도 이미 대결과 불인정이 아닌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고 평화공존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이후 집권한 사회적 시장경제의 설계자이며 전후 서독의 경제기적을 실현한 에어하르트 총리는 자기 자신의 동방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아데나워와 기민련의 전통적인 동방정책을 답습하면서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미국의 세계정책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환경에서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고수하였다.
이 점은 오히려 아데나워 시대의 대외정책의 한 축인 유럽 통합에 부담을 주었다. 프랑스 드골의 프랑스와 서독을 기본 축으로 하는 유럽 통합을 전제로 한 미국에 대한 유럽의 자립 노선과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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