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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1)

조연호 작가의 <한국 교회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 (138)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3.02 16:05 의견 0

과거 한국 기독교는 국가발전을 위해 공헌 했다. 그러나 현재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과거의 공적조차 지워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비판을 받는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 그리고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겠다고 작심한 성직자들에 대한 기대는 높은 게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담대하되 신중해야 한다. 여기서 담대함은 신앙적인 담대함이고, 신중함은 실행에 관련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신앙 부분은 비겁하게 타협했고, 그 실행은 과감하게 했다.

원론적인 말이지만 신앙 회복 없이 교회 개혁은 있을 수 없다. 이미 세상과 많은 부분 타협한 한국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신앙 회복이 가능할까? 한 개인의 기도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교회의 각성을 위해 데모라도 해야 할지. 혹은 이미, 때가 묻은 교회를 포기하고 유럽의 교회처럼 자연스럽게 소멸하기를 기다리면 될까?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를 멸하고 이사벨에게 겁먹고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주시고 함께 하는 7,000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려 주셨다. 분명, 필자 외에도 한국 교회를 걱정하면서 미래 교회 역할을 깊이 묵상하는 신앙인들이 많을 것이다.

위에 정리한 모든 내용을 그들과 나누며, 한국 교회를 개혁하고 싶다. 학창 시절 손봉호 교수의 ‘선지자적 비관주의’에 수긍했던 적이 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애써도 중한 병에 걸린 세상을 고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야 한다는 신앙적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지자적 비관주의의 허무함이 적용되려면,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신앙인들이 믿었던 종말이 곧 도래해야 한다(하나님의 시간을 인간의 개념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수천 년은 인간의 기준으로 상당히 길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실로 종합해 볼 때 새로운 천년이 지나도 심판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이렇게 말하면 신앙적인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적어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인간의 시간으로는 꽤 긴 시간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 시대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손을 떠났을 때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곧 회복시켜주셨다. 한국 교회가 간절한 마음으로 되새김 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 교회는 선진 문명이었고, 희망이었고, 진보였다. 그러나 현재는 고루 하고, 정체됐고, 꼰대처럼 보인다. 교회는 성장의 독(毒)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기독교인이 많아지고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한국 정도는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다.

숫자와 힘이 성경적 진리였다면, 예수는 당시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권력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광야 시험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욕망과 힘은 절제해야지, 추구할 목표가 아니었다.

경제 성장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성장이 가져진 불평등, 물질만능주의 등의 폐해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성장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장을 위한 부흥은 규모를 키웠을지는 모르지만, 역시 불평등을 낳았고, 교회가 비판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이 글을 쓰는 동안 코로나 19로 인한 감염이 한창 진행 중인데, 대구는 한 유사기독교(신천지)의 광신자로 인해 공포가 바이러스와 함께 공기 중을 떠돌고 있다).

이제 교회도 성장이 아니라 발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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