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오치우의 인물채집] 싹수있는 미래를 파는 상인 -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칼럼니스트 오치우 승인 2020.04.25 12:50 | 최종 수정 2020.04.25 12:57 의견 0
싹수있는 미래를 파는 상인 -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사진: 칼럼니스트 오치우)

서울엔 사대문이 있다. 그 4대문안에 사는 사람들은 '근본이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을 들었다.

옛날엔, 동대문은 인(仁), 서대문은 의(義),남대문은 예(禮), 북대문 흥인지문의 지(智), 그리고 그 가운데 오행의 중심에 있는 보신각의 신(信)자는 그야말로 인,의,예,지,의 중심에 신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 '문안사람'은 인, 의, 예, 지 를 알고, 그래서 '신의를 지키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그 네 가지를 무시하면서도 장안에서 행세하고자 하는 자들을 칭해서 문안의 사대부들은 "4가지도 모르는 자!", "싸가지 없는 놈들"이라 욕을 했다고 전해진다.(보통 욕을 할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수가 줄고 경음화, 또는 격음화 되는게 자연스럽다, 부정적 의미가 강한 '싸가지'는 또다른 관점에서 '싹수' 라는 긍정적인 단어로 변이 되어 여기서는 '싹수'로 표기한다.)

'서울 싸가지론'에 근거해 참으로  '싹수'가 있는 사람 '김완규'를 만났다. (그의 집안은 12대째, 사대문안 궁궐앞에 살았다.) 얼마나 '싹수'가 넉넉하겠는가? 그가 준 명함에는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라고 써있다. 그러나 그가 보통가게 주인은 아니다.

인사동 길 한 가운데 있는 그의 '가게'는 1층부터 6층까지 이고 그의 방은 인사동에서는 보기드문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까지 가서도 한층을 걸어올라가야 도달 할 수 있다. 보통 가게주인 보다 꽤 높은 위치에 있다. 1974년, '통인가게' 건물이 지어졌을때는 인사동에서 제일 높은 건물 이었다.

7층건물 꼭대기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그는  전함의 함교에 앉은 함장처럼 인왕산을 바라보고  비원을 내려다 본다. 그의 눈빛은 해처럼 부시지않고 달처럼 고요하지 않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 잠긴 태양처럼 투명하게 뜨겁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싹수'가 충만한 '높은 사람' 임을 알 수 있다.

싹수있는 미래를 파는 상인 -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사진: 칼럼니스트 오치우)

인사동에 나온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었다.

"소년시절에 '통인가게' 나왔으니까  꽤 됐지. 내가 개띠 거든. (그 흔한 오팔년 개띠가 절대 아니다) 1960년부터 부터 통인가게 에서 비상근 근무를 시작했어. 어른들 한테서 '남아가 12세에 호패를 차면 15세에 뜻을 세우고, 20세가 되면 세상에 나가 출세를 하고 장가를 가야한다.' 고 배웠으니까 중학교 다니면서 '통인가게' 다니는게 자연스러웠지"

그렇게 시작했던 '슬기로운 통인가게 생활'로 지금 그의 '통인가게'는 21개 계열회사를 거느리는 '큰 가게'
가 됐다. 당연히 '큰 사람'들과의 큰 거래가 그를 키웠다. 미켈란젤로를 존재하게하고 르네상스를 일궜던 '메디치'가를 닮은 '록펠러'와의 조우는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의 사업관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데이비드 록펠러 미국 체이스맨해튼은행장이(1915~2017)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처음 방한 했을때,그는 청와대 공식일정 후 통인가게에 왔고 김완규는 금강산 민화를 팔았다. 깎아달라는 록펠러의 간청을 단칼에 잘랐다. 그 후에는 공항에서 바로  통인가게 부터 찾아와 물건을 샀지만 단 한 번도 깎아주는 법은 없었다.

''내가 세운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 누가 나를 원칙대로 대해 주겠어? 타계하신 호암이나 며느리인 홍라희 여사도 관계자들에게 '통인가게 가서 깍자는 말 절대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하더라고. 당연하지. 받지도 않을 돈을 말하고 주지도 않을 돈을 생각 하는 거 우스운 일이지 !''

김완규가 통인가게를 물려 받았을 때가 그의 나이 스물세살이었다. 인사동의 골동품, 고미술 전문가들이 펄쩍 뛰면서 "말아 먹을 일 있냐?"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난, 내아들 믿는다!"며 통장과 도장을 맡겼다. 

선친의 선견지명대로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미 '큰사람'과 상대할 수 있는 '큰사람'이 되어 있었던  거다.

''사람공부 많이 했지. 한양대에서 공학공부 했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공부가 젤 힘들어, 허긴 그 만큼 재미있는 공부도 없지.''

자연히 사람들과 술을 많이 마셨다. 통인가게로 찾아오는 작가들과, 골동품을 들고오는 도둑들과 가짜골동품을 만들고 바람잡는 사기꾼들과 몰락한 사대부의 후손들과, 술판에서 흔들리며 옥석을 가리는 일 또한 통인가게 주인의 주요업무 였다. (다른 술꾼과는 달리 지금도 그는 늘 안주를 다양하게 풍족히 시킨다. 아마도 술핑게로, 굶주린 속을 채우려 찾아오던 사람들에게 하던 습관 일 거다.)

''한번은 저녁 8시에 집에 들어 갔다가 아버지한테 혼났지. '이렇게 일찍 들어오면 너 기다리는 사람들 어떡하냐? 그 사람들 무시하면 안돼!' 그러셔서 큰 잘못을 한 것 같아 다시 나온적이 있었어. 밤새 술에 쩔어 넘 힘들었는데...'' (아버지는  알았던거다. 궁핍한 시절, 하루종일 주린배를 껴안고 장안을 휘돌다, 통인가게에 가서 술핑게를 대고 흐벅진 안주로 배를 채우려 했던, 돈 없는 예술가와 가산을 팔러나온 선비와 거짓말 못해 가난한 장사치들의 아찔한 허기를...)

싹수있는 미래를 파는 상인 -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사진: 칼럼니스트 오치우)

오래전 부터 인사동에 떠돌던 전설이 있었다. '냉면그릇에 소주 20병!', 전국에 떠도는 '맨주먹 17대1전설' 정도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그때, 인사동 고참들이 신고식 뺑뺑이를 돌리던 때야. 어린 놈이 외국인들 하고만 노니까 소주로 군기를 한 번 잡으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소주 잔 번거롭고 맥주잔으로 하자 그러다가 나중에 냉면대접에 부어서 마셨지. 냉면대접 나왔으면 다 끝난거지 뭐 17대 1 이 별거아냐...''

역시 인사동은 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강호 고수들의 서식처다. 그리고  '사람공부'는 참으로 쉽지않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그 고난도의 학문을 가르칠 수 없었던거다.

 

''아버지한테 배웠지. 고려청자는 절대 사지도 팔지도 말라. 그러셨어. 백프로 도굴품 이라고, 그리고 불화는 절에서 도둑질한거니까 당연히 거래불가!''원칙을 지키는게 참 어려운거야. 돈이 뻔히 보이는데 ᆢ그러니까 장사는 돈을 버는게 아니라 사람을 버는거거든..''

그는 사람을 버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록펠러를 감동시켜 그 힘으로  '통인가게'를 전세계로 알리고 한국의 문화를 수출했다.

싹수있는 미래를 파는 상인 -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사진: 칼럼니스트 오치우)

 ''아버지가 집안에 쓰던 진짜 골동품을 팔았다면 나는 소위 '되살림 가구'로 불리는 소품들을 만들어 수출을 했지. 인사동 사람들이 진짜골동품을 팔때, 나는 그 골동품보다 더 비싼가격에 '되살림 가구'를 만들어 해외에 팔았으니 그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기도 했어'' (되살림 가구는 골동 소품이나 가구등 옛것을 다시 되살려 만든것을 말한다)

어쨌든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의 사람 농사는  전세계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거침없이 성장해 왔다. ''세계적인 회사가 되려면 세계적인 시스템을 갖추라!'' 고하는 록펠러의 조언으로 통인 익스프레스, 통인인터내셔널을 설립한 '통인가게'는 주한미군의 이사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시에 ''통인안전보관'등의 유관 사업을 확장하며 1조단위의 매출목표로 21개 계열 회사를 튼실하게 운영하고 있다.

''전계열사의 100%지분을 내가 가지고 있어. 꼭 갖고 싶어서 보다는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지. 세금 회피할 생각없고 상속 때문에 딴 생각 하지 않아. 아버지처럼 나도 아들을 믿기 때문이지. 혼자서도 잘하는 아들한테 상속이 꼭 필요한가?''

다 이룬것 같은 그에게도 조급한 마음으로 견주는 프로젝트가 있다. 강화도! 강화도에 <통인박물관>과 테마전시관 10개를 설립하는 일들이 지금 실행되고 있다.

''문화예술의 최강국 코리아를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세계문화수도'를 강화도에 만들고 싶어서 저지르고 있는거지. BTS가 너무 큰 메세지를 주고 있어. 전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통인가게' 가 한 몫을 해야지. 문화예술의 종합편 'K팝'을 만들고 말꺼야.''

2년 후 창업 100년을 맞는 '통인가게'는 물건만 파는 가게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인사동의 K팝을 주도 해왔던 '통인가게'는 '조선풍류'라는 타이틀로 가슴 써늘한 판소리와 오페라 공연을 100회 가까이 베푸는 등 100년 기업다운 문화저력을 다져왔다.

싹수있는 미래를 파는 상인 -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사진: 칼럼니스트 오치우)

창업 100년을 앞둔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가 민감하게 구분하는  단어가 있다. '장사치'와 '사업'이다.

'''장사치'가  될려면 예전에 접었지, 난 이제 '사업'을 하는거야. 차이가 뭐냐고? 장사는 나, 내식구를 위해 하는거고 사업은 내 나라, 내국민을 위해 하는거지! 호암선생이 혼수상태서 잠깐 깨어나셔서 '반도체 두 트럭이 나갔다고? 그럼 이 나라가 앞으로 잘살거야' 라고 하셨다는데 울컥했지. 그게 사업가야! 이 나라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그게 내가 해야될 사업이지,호암처럼 담대하게 이나라의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과거를 연구하는 그의 머리 속엔 미래의 환타지가 소용돌이를 일으켜 늘 새벽잠을 '훅!' 깨운다.

 ''지금 내 화두는 그거 하나야,강화도! 일단 강화도 사업이 내겐 독립운동이야! 강화도가 문화수도로서 세계인에게 각인되서  K팦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 ''

참 ''싹수'' 가 있는 장사꾼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는 늘 과거를 말했다. 그가 보여주는 것들 역시 수십년, 수백 년 전 물건들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 속에는 미래가 있다. 그가 말하는  '과거'에는 탄탄한 미래의 씨앗이 살아있고 그의 '과거'는 '미래의 일부' 일 뿐이다.

오늘도 과거의 시간을 파는 공간 '통인가게' 에서 주인 '김완규'는  일푼도 에누리 없이 '싹수 있는 미래' 를 판다. 식구가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