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오치우의 인물채집] 히틀러의 눈빛을 가진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승인 2020.05.27 19:46 의견 0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은 안젤리나 졸리를 닮았다. (이미지만?) 미국영화배우중 가장 괴팍하면서 쌈 잘하는 배우는 존 보이트였다. 그의 딸인 안젤리나 졸리가 허리우드에서 쎈여자 캐릭터로 각광을 받는 건 우연이 아니다.

헌데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의 ''쎈여자'' 스토리는 뜬금없다. 1990년대, 나름 알아주는 이대 대학원까지 나오고 당시 큰 돈을 벌던 패션 디자이너의 경험치고는 참으로 생경하다.  

그때 비싼 차를 타고 다녔어요. 트렁크를 닫으려고 하는데 옆구리에 칼이 훅 들어오는 거예요. 소리치면 죽인다구요. 눈가리고 손 묶여서 어디론가 가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기름을넣자!  차 서기전에"
그랬더니 안대하고 손을  풀어 주더라구요. 그때부터 대화를 했지요. 참  불쌍한 애들 이었어요. 고아원에서 살다가 감방에서 만난 애들 둘이 강도가 된거예요.

차안에서 밤새 얘기 하다가 같이 다 울었어요. 서로 불쌍해서... 그때 돈 벌 때니까 돈을 줬어요. 그리고 헤어질때 얼굴 좀 보자했더니 복면을 벗고 "미안해요 누나!"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라구요. 차에 칼을 두고 가길래 '네 물건은 챙겨가라!' 했지요'' 

그렇게 살지 않기로 약속하고 헤어진 그들은 그후에 어찌 사는지 모른다. 딱 한 번 전화가 왔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말 미안하다. 잘 살겠다"고 말했단다. 그 후 청담동 3인조 강도가 체포됐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그들이 아니길 빌었다.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20대에 독립브랜드를 만들었고 30대 초반에 직영패션 샾에서 하루 매출 1억 이상을 찍었으니 꽤 큰 돈을 벌었고, 그런 이유로 그녀는 서투른 강도들의 표적이 되었던거다.

좀 놀라긴 했지만 두렵지 않았어요. "하나님 왜 이러셔요. 나보고 어찌 하라고?" 물었어요. 그들이  원하는게 뭔지 알았고 내가 그걸 줄 수 있었으니 맘이 놓였지요. 적지않은 돈이지만 빼앗긴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으니까 당연 신고도 안했고요.

패션디자이너 유지영은 겁없는 여자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을 알았고 그의 무기는 '딱보면 아는' 거였다. 처음엔 매장의 디스플레이를 시작 했다가 디스플레이 컨셒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소비자와 교감하며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버린 거다.

<noo>라는 브랜드를 세상에 던졌다. "누구세요?"라는 물음이었다. 그걸 <Who>가 아니라  <noo>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용케 알아듣고 답을 해 왔다. 

여세가 이어지며 후속 브랜드 <점>도 폭발적인 신장세를 이어갔다. 내가 다른 '점'이 있다는걸 주장한 브랜드다. 예쁜옷의 상식을 깬 <noo>와 <점>, <지지배>는 점점 커졌다. 그렇게 유지영은 업계에서 돈 잘버는 디자이너가 되어갔다.  

98년도엔 밀리오레에 디자이너들의 산실인 <VMD>의 기획데스크를 맡아 새로운 개념의  '디자이너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어서 청담동에 샾을 오픈하고 패션위크에 공식데뷔를 했다. 데뷔하자마자 홍콩, 동경에 초청브랜드가 되어 샾과 지사 설립을 했다. 얼떨떨한 수직상승이었다.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하고싶은 대로 만들면 정신없이 팔리는 바람에 터무니 없는 확신에 빠지게 되더라구요. 원하는대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원하는 만큼 팔았어요. 국내 생산이 어려워서 중국 광저우에 생산라인을 만들고 광저우에서 상주하며 작업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한국에서 찾아온 감당 못할 악연과 조우하며 디자이너 유지영은 즉시 귀국, 사업도 작업도 포기하고 모든 일들을 중지 시켰다. 

내가  아무것도 없어서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면 그 악연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망했다. 이백억 정도의 자산을 스스로 내던지듯 청산하며 쓰라린 삼십대를 보냈다. 칼을 겨눈 강도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던 그녀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탈출하고팠던 그 악연의 실체는 '사람' 이었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욕되게 하는 걸 참을 수 없었고 그 것으로 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그동안 얻은 것들을 다 버렸지요.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그리고 진공관 속에서의 삶처럼 지내던 어느 날, 삭막하던 가로수길 한가운데 편히 밥먹을 집을 마련했다. 은행 빚을 내서 마련한 <그랜드마더>는 가로수길의 랜드마크가 됐다. 

제가 참 용감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손대면 돈이 되더라구요. <그랜드마더>도 물론 그랬지요. 헌데, 큰 돈이 고이는건 저 밑바닥이더라구요. 물만 밑으로 흐르는 줄 알았는데 돈은 더 밑에서 흐른다는걸 옛날엔 몰랐어요.

<그랜드마더> 가로수길 시대를 혼자 끝내고 나서 마흔두살의 자연인이 된 유지영은 생애 최초로 방문한 은행창구에 서서 펑펑 울었다. 당황한 창구직원이 놀라 뛰쳐 나오자 소액의 현금을 손에 움켜쥔 그녀는 코메디 영화의 배우처럼 대사를 읊었다. 

내가 혼자 은행에 와서 돈을 찾았잖아요. 난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더 당황한 은행직원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영문 모르고 곁을 지켰다. 모든 일들을 비서가 처리했고 특히 은행 일은 그녀가 감당못할 고난도의 업무라고 알던 그녀의 은행 첫 경험은 눈물나도록 특별한 일이었다

가로수길에서 시작된 <그랜드마더> 시대는 거하고 청담동 <그랜드마더>와 예술의전당 <그랜드마더>를 거쳐 2016년에 <그랜드마더>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그만할때가 된 거지요. 디자이너 유지영으로 다시 시작할 때가 됐더라구요. 그래서 더 용감해졌지요. 2016년, 패션위크에 디자이너 유지영으로 다시 섰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그녀의 '디자이너' 발음은  묘하게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느낌처럼 강렬하게 들려왔다. 태생적으로 초식동물이 아닌 탓이다. 맹수의 눈빛으로 세상을 보고,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절대로 내지 않으며 당연히 풀 뜯어 먹는 소리를 내는 동물을 상종치 않는다.

다시 패션디자이너 유지영으로 살기 시작한 2016년 이후부터 그녀는 세상을 지배하는 패션의 권력을 되찾기위해 대중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화방식은 보통의 디자이너처럼 환타스틱하거나 엘레강스하거나 스윗하지않다. 오히려 선동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도발적이다. 

자연인 유지영이 아닌 '디자이너 유지영'으로 말할때, 그녀의 눈동자는 커다란 눈 한가운데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 맹수의 눈동자처럼 흔들림이 없다. 히틀러의 눈빛이 그랬다. 흔들리는 독일인들에게 '위대한 게르만!'을 외칠때 히틀러의눈빛이 그랬다. 

그리고 히틀러는 나치 패션을 만들어 대중선동과 최면에 성공했다. 그의 연설이 10만명을 설득했다면 나치의 패션은 천만명에게 '위대한 게르만'의 자존감을 심어 주었다. 패션은 때때로 대중최면과 선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디자이너 유지영은 그런 패션의 대중지배력을 아는 영악한 디자이너다.  

코로나19의 전 세계 폭격으로 세계적인 '두바이패션쇼'가 취소될 위기에 있던 3월 12일. 그녀는 거침없이 두바이행 비행기를 탔다. 전사처럼 단련시킨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우리가 참여한 두바이패션쇼는 뉴욕,런던,파리,밀라노를 잇는 세계적인 패션쇼 였는데... 결국, 코로나19사태로 메인오픈이 잠정 연기 됐지만 저희는 현지 도착한 디자이너팀들과 예정된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돌아 왔습니다.' 

메인 오픈이 아니어서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함께했던 시니어 모델들이 세계적인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런웨이를 걸을 때 가슴뭉클했지요. '런웨이'는 말 그대로 '런웨이' 거든요.

'런웨이'에서 제 속도를 내면 반드시 떠오르게 된다.  활주로의 비행기처럼... 
디자이너 유지영! 그녀는 지금이 순간, 지구의 중력을 뿌리치고 이륙하는 비행기의 조종사처럼 런웨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녀의 가슴속에 장착된 '마하'를 뛰어넘을 제트 엔진이 자꾸만 울컥 거리기 때문이다.

유지영은 히틀러의 눈빛을 가진 디자이너다!

패션 디자이너 유지영  (칼럼니스트 오치우)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