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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01)]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1.17 20:28 | 최종 수정 2023.01.26 22:29 의견 0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오르지만, 그의 수상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작품의 완성도와 독창성은 좋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작가를 선정하는 심사위원들에게 수상자로서의 각인은 다소 부족한 듯하다.

첫째, 정치적 메시지가 없다. 인간에 대한 탐험과 진지한 성찰은 있으나 대 사회적인 목소리는 크지 않다. 둘째, 시공간적으로 일본적인 향수가 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시공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유독 하루키는 작품 속에 일본적 체취를 가득 담는다. 아울러 시공간의 이동에 관련한 작품-『해변의 카프카』, 『1Q84』 등–을 써서 물리학적 한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차피 다른 공상 과학 작품과 비교하면 작가가 시공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상상력을 파격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은 독자들이 쉽게 빨려 들어갈 만큼의 매력이 있으며, 읽고 나서도 잠시 생각의 꼬리를 늘여가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해변의 카프카』는 200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등장한 지 20년 넘은 작품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써서 독자들을 심란하게 만든다.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고, 가독성도 떨어져서 쉽게 이해할 수도 없다. 본 작품을 읽다 보면, 하루키가 카프카를 오마주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수께끼같이 작품이 전개된다.

주인공은 15세 생일에 가출을 감행한다. 이름을 ‘카프카’로 바꾸고 스스로를 위장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어머니와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의 가출은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와 누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행 중에 그는 누나라 예측되는 ‘사쿠라’라는 여인을 만나고, 후에는 한 도서관에 정착하면서 어머니로 예측되는 ‘사에키’라는 중년 여성을 만나 섹스를 한다. 아버지는 ‘천사표’ 지적장애인 나카타에게 스스로가 의도한 죽임을 당하고(그런 의미에서 자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카타는 살인 후 ‘입구의 돌’을 찾아 떠나게 된다.

나카타는 호시노라는 청년의 도움으로 입구의 돌을 찾아 뒤집고, 이후 카프카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15세에 머물러 있는 어머니 사에키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그곳을 떠나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이후 나카타는 조용히 숨을 거두고 그를 도와줬던 호시노가 다시 입구의 돌을 뒤집는다. 이런 일말의 여정을 끝으로 카프카는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라는 예언을 성취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高)차원적인 독자

작품은 카프카와 나카타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두 주인공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독자는 이 둘의 만남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들을 이어주는 ‘입구의 돌’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매개체가 있지만, 카프카는 나카타의 도움으로 저 세상을 방문했을 뿐이다. 분명 한 명은 도와주고 한 명은 그 도움으로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그 둘이 연결됐다는 사실은 독자만이 알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관점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3차원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2차원, 즉 면을 볼 때 우리는 3차원 존재로서 2차원 세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린 작가의 작품 속에서 독자는 새로운 차원의 존재자로 두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볼 수 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다만, 2차원적 공간에 작품을 썼기에 독자는 조금 더 높은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읽혀지는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상상하며 지켜볼 수는 있지만, 영화 『인터스텔라』 에서처럼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고차원적 독자로 남는다.

◆그리스 비극의 재구성

그리스 비극의 주제는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오이디푸스』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오이디푸스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강제로 버려지지만 결국, 예언은 이뤄지고 만다.

본 작품도 오이디푸스 비극을 그대로 실현해 나간다. 아들을 왜 저주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카프카가 그를 죽이고 엄마와 누나가 섹스를 할 것임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실현된다. 작품 속에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나카타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카타가 죽인 자는 정확하게 ‘조니 워커’라는 사람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예술가가 아니다. 어느 날 밤 의식을 잃은 카프카와 그의 옷에 남은 혈흔, 그리고 시공간의 경계를 허술하게 만든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살해했을 수도 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몇 시간이 그 단서가 될 것이다.

하루키는 그리스 비극을 작품의 전개에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서 마술적 장치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프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나와 정사를 나눈 것이다. 역시 오이디푸스와 같다. 아버지인지도 모르고 살해하고,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아내로 삼는 비극의 인물 오이디푸스. 단, 카프카는 어머니일 수도 있음을, 누나일 수도 있음을 알면서 정사를 나눈다는 점에서 비극이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의 비극을 다뤘지만, 하루키는 근친상간을 통한 성장을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예언의 실현을 목도하고 바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그러고 난 후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카프카는 이 모든 예언을 실현한 후 잠을 잔다. 여기까지는 오이디푸스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눈을 떴을 때, 그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된다. 비극이 아니라 성장이 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변의 카프카』는 작가가 말한 대로 성장기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역경 끝에 성장하는 인간이라는 교훈을 남기니까.

◆작품 전개를 위한 마술적 장치

작품은 마술적 장치 없이는 전개할 수 없게 구성했다. 어차피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린 설정자체가 마술적이다. 다만 마술적 장치가 너무 자주 등장해서 리얼리티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의 섬세한 스토리 전개가 있기에 마술적 장치를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게 작가의 탁월함이다. 나카타의 등장을 위해서 이유 없이 쓰러지는 학생들을 등장 시킨다. 그리고 혼자서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던 나카타는 지적장애인이 돼 고양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후 하늘에서 떨어지는 생선과 거머리, 입구의 돌을 찾아가는 도중 등장하는 ‘커널 샌더슨’, 역시 갑자기 등장하는 철학과 매춘녀 등.

어차피 현실성 없는 작품이었기에 작가는 마술적 장치를 사용해서 현실적인 장치로는 작품이 끊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을 절묘하게 연결한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안 되는 일을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어색한 요소로 이해했지만, 읽으면서는 어쩔 수 없는 장치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문학은 작가 상상력의 산물이니 그 정도가 작고 클 뿐 아니겠는가?

◆폭력을 극복할 방법은 오직 사랑 뿐

작품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그리고 잿빛 가득한 전쟁터를 연상케 한다. 15세 주인공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을 정도로 어둡게 자랐다. 어머니는 그를 버렸고, 아버지는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나카타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적장애인이 됐지만, 그를 돌봐주는 가족이 없다. 오히려 그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들은 주변인물이다.

가정에서의 폭력, 그리고 사회에서의 외면과 폭력으로 두 주인공은 집을 떠나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머물 던 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를 향하게 된다. ‘입구의 돌’은 두 사람이 찾는 공감대였으며, 어느 한 사람만의 힘으로 찾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카프카를 도와주는 도서관 사서 오시마 역시 사회적 편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살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으로 억눌린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서관장으로 등장하는 사에키는 어린 시절 이유 없는 폭력으로 숨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 이후 그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버리고 떠나는 감정적 폭력을 행사한다.

“싸움은 싸움 자체 속에서 성장해 가거든, 그것은 폭력에 의해 흐른 피를 마시고,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살을 뜯어 먹으며 성장해 가지.” - 작품 속에서

폭력의 결과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와 누나와 근친상간까지 이뤄져야 해소된다.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그리스 비극적 전개지만,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폭력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사랑’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누나와의 육체적 사랑이 상징하는 게 결국 폭력의 해소는 사랑이라는 다소 진부한...

우리 사회의 복수를 떠올려 보자. 정치적인 복수가 대한민국의 정치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으며, 꼭 정치 분야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고, 때론 피해자가 돼 있다. 물리적인 폭력이든 감정적인 폭력이든 숱한 폭력적인 요소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더 각박해 간다.

1인당 CCTV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가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이 말은 좋게 생각하면 안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더불어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사회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어릴 적 시골에 가면 커다란 비석에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현재 그 마을에는 노인들만 살고 있지 않다. 폭력을 행사하려 해도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도시의 노인들은 ‘꼰대’역할을 통해 독특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폭력의 원인이 무관심, 자존감 상실 등에서 유발된 거로 생각한다면, 진정한 해결 방법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이 될 듯하다. 그게 육체적 사랑이든, 정신적 사랑이든 어쨌든 사랑이면 될 듯하다. 작가가 말한 사랑은 어차피 고차원적이어서 3차원의 세계에 머무는 독자들에게는 좀 더 큰 상상력이 필요할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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