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비즈니스맨들마다 "조만간 봅시다", "언제 밥 한 번 먹어요"라는 말로 둘러댄 채 놓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난 5월 4일, 차량을 몰고 어딘가 이동중이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분과는 5개월 전 즈음에 마지막 만남을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언제 시간되느냐"는 조금 구체적인 미팅 요청이었다. 마침 운전중이기도 해서 다이어리를 펼칠 수도 없어 평일 중의 일정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무심결에 "내일이 어린이날 휴일이니, 별 일 없으시면 어린이날을 어른이날 삼아 만나요"라고 농담을 툭 던졌다. 뜻밖에도 그 말 덕에 덜컥 약속이 잡혔다. 맛있는 점심을 사주신다고 하여 기대로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인 어린이날은 비가 계속 내렸다. 점심 약속을 앞두고 비가 그치길 바랬으나 일기예보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그칠줄 모른다. 비 오는 날이니 따끈한 국물요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걸었다.
공릉역 3번출구에 있는 청학골에서 만나자고 한다. 여기는 예전에도 두어 번 온 곳으로, 이 지역 맛집으로 오랫동안 사랑받는 가게다. 소갈비가 유명하고, 넓은 공간과 주차장이 있어 가족, 친지행사, 단합대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올 때마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 탓에 소갈비는 먹어보지 못하고 돼지갈비와 삼겹살, 목살만 가볍게 먹고 2차로 자리를 옮겼던 기억만 난다.
참고로 공릉역은 서울과학기술대(옛 산업대)와 원자력병원이 가깝기 때문에 음식점, 주점 등이 밀집해 있고, 청년층이 많이 오가기에 재미있는 가게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안마을'이라 불렸던 서울의 초창기 시절의 주거지가 있어 숨은 노포들도 발견할 수 있다.
유명 맛집으로는 전국에 체인점까지 두고 있는 '공릉동 닭한마리', '공릉동 멸치국수'를 꼽을 수 있으며, 경춘선 숲길을 따라 골목 사이사이로 젊은 감성의 맛집, 카페, 디저트가게들이 있어 Old&New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바꿔 말해 맘만 먹으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펍 크롤링(Pub Crawling)이 가능해 대체 몇 차까지 마셨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주머니를 탈탈 털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튼 각설하고 만남의 장소인 청학골에 들어가 앉았다. "왕갈비탕 괜찮으시겠어요?"라는 말을 듣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차림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왕갈비탕이 17,000원! 대체 얼마나 특별한 갈비탕이기에 가격이 17,000원이나 할까?
최근 2년 새 밥값이 2차례 정도 오르면서 갈비탕 한 그릇에 13,000원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여기가 서울 한복판 광화문이나 땅값 비싼 강남도 아니고 변두리인 공릉동에서 17,000원이나 하는 갈비탕이라니!
특별한 한끼를 주장하는 나의 까탈스러운 성향 탓에 점심을 베푸는 분에게 부담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미안한 마음은 5분도 가지 않았다. 점원이 갈비탕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 내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돌았다. 큰 뚝배기 안에 갈빗살이 튼실한 갈비가 2대나 담겨있다.
이를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다른 생각은 사라지고 "뚝배기에 가득 담긴 갈비를 어떻게 발라먹을까?"하는 고민만 아주 긴급하게 했던 것이다. 옆에서 보면 언뜻 말뚝을 비스듬히 박아놓은 형상이지만, 뚝배기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아메리카 인디언의 돌도끼인 토마호크를 연상케한다.
자아... 그럼 이제 토마호크를 들어볼까? 왼손으로 살점이 가득한 갈빗대를 집어 들어 앞접시에 내려놓은 다음, 인정사정 손속을 봐주지 않고 발골작업에 들어갔다. 갈비 한 대를 발라놓으니 앞접시 하나가 그득하구나...
보통의 갈비탕을 먹을 때는 뚝배기나 냉면사발 안에서 숟가락 하나만 사용해 조용히 침묵하며 조근조근 숟가락을 넘기게 되지만, 이 왕갈비탕은 다르다. 상차림 자체가 사냥 본능을 일깨워주어, 그 본능으로 머릿 속을 뒤집어버려 사냥을 위한 행동으로 식사시간 내내 부산해지게 만드니 정말 재밌는 갈비탕이다.
발골을 마친 후, 이미 잘 삶아진 갈비살을 한 점 들어 양념에 찍어 야금야금 먹으면서 숟가락으로는 갈비탕 국물을 한 모금씩 떠마시니, 국물 속에서 지근지근 씹혀오는 대파의 느낌이 다르다. 보통의 갈비탕을 마실 때처럼 한 숟가락 속에서 작은 갈비살에 섞여 함께 씹히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파의 진한 향과 단맛을 갈비살과는 별개로 즐기는 즐거움이 있다.
게다가 갈비가 2대라 이런 즐거움을 2번 반복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다만 이를 3번째의 즐거움으로 이어가기에는 꽤 배가 불러와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든든한 양이었다.
든든함으로 따진다면 안국역 어느 골목 사이에 숨어있는 곰탕집을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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