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동 찜갈비 골목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평행한 블록에 자리 잡고 있다. 직선거리만 보면 가깝지만, 신호등 두 번 건너야 해 10분 조금 넘게 걸어 도착했다.
찜갈비가 대구의 대표 메뉴로 자리 잡은 것은 1960년대다. 동인동 어느 대포집에서 매콤한 안주를 만들어 달라는 손님 덕에 그날 있는 재료로 만든 것이 찜갈비였다는 설도 있고, 동인동 사는 어느 부부가 갈비를 무척 좋아했는데 남편 술안주로 만든 게 소문나 찜갈비 장사를 시작하며 확산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청 건물의 사이니지. (사진: 방랑식객)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의 야경 (방랑식객)
■고기가 맛있는 대구?
그런 걸 떠나 내가 처음 동인동 찜갈비에 관심을 가졌던 건, 이곳이 대구라서였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먹어본 방랑식객 입장에선 대구만큼 육류의 가성비가 좋은 곳이 없었다. 가격이 저렴해서 수입산인가 살펴보면 국내산인 경우도 제법 많다. 대구를 대표하는 메뉴 중에 ‘뭉티기’가 있는데, 육회가 이렇게 싸고 맛있으려면 소고기 소비량이 많은 곳이어야 가능하다. 235만 대도시라는 인구 규모도 한몫하지만, 대구 사람들이 육류를 좋아하기에 싸고 맛있는 거 아닐까?
이런 전통은 1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 동편의 경산시에는 ‘압독국’ 혹은 ‘압량국’이라 부르던 고대국가가 있던 곳이다. 압독국 고분 속 유해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육류를 제법 섭취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꿩을 즐겨 먹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게 1인1닭의 기원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사진: 방랑식객)
가게 입구 (사진: 방랑식객)
■찜갈비를 포기한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식객은 찜갈비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느 가게를 갈까 지도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이 골목 대부분이 수입산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다. 단가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대구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메뉴를 찾던 참에 지인의 추천으로 김치찜에 관심이 쏠렸다.
그렇게 가게 된 ‘동인동가 한옥집 김치찜’. 가게 이름만 들으면 오래된 한옥 음식점을 떠올리겠지만, 실제로는 한옥이 아니다. 나중에 사장님께 여쭤보니 예전 가게가 오래된 한옥이었고, 장사가 잘 되어 옮겨온 곳이라고 했다.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다소 오래된 건물인데, 들어오는 입구에도 가게 선전 벽보들을 붙여놓아 어수선함이 있지만, 가게 안에 들어오면 벽면 가득 손님들의 낙서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이런 분위기는 여기가 부담 없이 올만한 값싼 음식점이라는 증거지만, 동시에 많은 단골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임을 말해준다.
메뉴는 달란 2가지, 김치찜(10,000원)과 김치찌개(9,000원) 뿐. 메뉴 자체에서 선택과 집중이 느껴짐다. 게다가 라면사리, 공기밥 무한이라니! 대체 어떤 퀄리티의 음식일지 불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왔기에 김치찜 1인분과 김치찌개 1인분을 주문했다.
낙서가 빼곡한 가게 내부 (사진: 방랑식객)
메뉴는 달랑 2가지 (사진: 방랑식객)
2가지 메뉴를 모두 맛보기 위해 각각 하나씩 주문해 보았다. (사진: 방랑식객)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김치찜
음식이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김치찜이었다. 미리 김치사이에 고기를 넣고 충분히 쪄놓아 음식이 테이블에 오르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한참 돌아다녀 배고픈 우리들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식사시간이 부족한 손님들에게도 큰 장점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김치찜 속에 들어있는 고기는 쪽쪽 잘 찢어지고 입속에서 되게 부드럽게 녹듯이 씹혔다. 묵은지의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듯 달큰한 맛이 고기 속에도 흠뻑 배어 있어 스팸이나 햄처럼 가공된 육류를 먹는 듯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접했던 김치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확 풍기는 들기름의 풍미도 훌륭했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직접 담아 묵힌 묵은지와 특별히 맞춘 들기름을 사용한다고. 돼지고기도 국내산을 쓴다. 먹는 내내 그냥 신김치가 아닌, 제대로 숙성시킨 묵은지가 고기와 만나 깊은 맛을 내게 하기까지의 노고와 시행착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엔 양이 부족해 보이지만, 막상 먹다보면 적은 양이 아니다. (사진: 방랑식객)
힘 안들이고도 쪽쪽 찢어지는 고기찜의 맛은 스팸과 같은 가공육과 비슷하면서도 비교가 불가능한 세련된 맛이었다. (사진: 방랑식객)
■라면과 궁합이 완벽한 김치찌개
김치찌개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 역시 묵은지에 돼지고기도 듬뿍 썰어 넣었다. 다소 특이한 점은 이 찌개는 마치 라면을 끓여 먹도록 설계된 듯했다. 처음 나올 때부터 국물이 흥건하고 간도 칼칼하게 되어 있어 라면을 넣었을 때 국물을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일반적인 김치찌개는 처음부터 라면을 넣어 먹 게되면 라면의 전분과 기름기 때문에 국물 맛이 혼탁해진다. 김치찌개를 먹는 게 아니라 김치라면을 먹는 게 되어버린다. 이곳의 김치찌개는 그런 점까지 고려해 라면이 김치찌개의 일부가 되게끔 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식사의 즐거움을 더한다. 밥과 라면사리가 무한리필이기에 먹성 좋은 손님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우리가 먹는 내내 뒤의 테이블에 앉은 3인의 청년들이 밥과 라면을 리필해가며 왁자지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육수를 흥건하게 담아주어 티가 나지 않을 뿐, 김치찌개와 돼지고기의 양도 푸짐했다. (사진: 방랑식객)
라면사리가 필수라고 여겨질 정도로 잘 어우러지는 훌륭한 맛이다. (사진: 방랑식객)
■식재료에 대한 남다른 고집
가게 문 앞에 붙여진 벽보에는 김치찜 맛있는 법이 크게 적혀 있는데, 고기를 김치로 말아 김과 함께 싸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김의 바삭한 식감과 바스라지며 나는 풍미, 고소한 맛, 입 속에서 마무리될 때 나오는 단맛 등이 묵은지 김치찜과 고기찜과 잘 맞기 때문도 있지만, 최고의 맛이 페어링되도록 김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냥 보기엔 기성품인 성경김을 받아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장님께 물어보니 아침마다 갓 구워져 포장된 것만 받아 그날 다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 가게의 음식 맛은 묵은지 하나에만 집중해 얻은 맛의 비결이기도 하지만, 이밖에도 가게를 찾을 고객대중의 형편에 맞춰 적응시킨 2가지 메뉴의 개성, 함께 곁들일 핵심 식재료의 품질관리와 고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3명의 파티를 꾸려 오고 싶다. 김치찜 2인분과 김치찌개 2인분을 주문한 다음, 김치찜을 게걸스럽게 해체해 우선 소주 2병을 비우고, 김치찌개에 라면사리를 계속해서 끓여가며 소주 2병을 천천히 나눠 마시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나 할까? 그러자면 대구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겠지? 다음에는 좀 더 묵은지를 즐기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켜 보는 것으로!
김치찜 맛있게 먹는 법. 이대로 따라 먹는 게 제일 맛있었다. (사진: 방랑식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