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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23)]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 영원한 향기는 없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10.17 23:12 의견 0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존재감 없는 멤버가 있어서 “『향수』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루누이처럼 보이네”라고 말하자마자, 30~40대 멤버들이 각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만큼 『향수』는 현재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속한 성인이라면 서점에서 하얀 색 양장 표지의 책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디자인도 괜찮고, 제목도 좋아서 나처럼 성급하게 집어 들어서 읽었던 독자도 꽤 있으리라.

그러나 예쁜 책의 표지와 제목에서 느껴지는 향기와는 다르게 내용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향수’라는 큰 글씨 아래 작게 쓰여진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대목을 그냥 넘어간 대가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었다. 다 읽고 난 처음 느낌은, 그냥 ‘한 정신병자한테 희롱당하는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2천 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책을 낼 때마다 초쇄도 다 판매하지 못하는 나에게 ‘2천 만부’는 기적의 숫자이기도 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수』 이 전에도 『좀머 씨 이야기』를 비롯해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아서 작품이 리뉴얼 돼 다시 출간 됐다. 대체로 길지 않은 작품이나, 주제는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작가는 본 작품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원하는 사랑임을 강조한다. 사랑이라는 언어를 머리로 알고 관습적으로 실천하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을 생각해 주길 요청하는 글이다.

(출처: 열린책들)


장바티스 그르누이는 세상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곳에서 태어났다(한여름 생선비린내가 진동하는 전통 시장을 떠올려 보자). 그의 엄마의 다섯 번째 아이였는데, 엄마는 그를 낳자마자,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까?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인생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그르누이는 고아원, 보육원 등을 전전긍긍하면서 성장한다.

그의 보육비가 끊기자마자, 그는 무두질장이에게 노예처럼 팔려가고, 그곳에서 짐승처럼 일하다가 그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향수제조판매업체로 옮겨간다. 신이 그에게 부여해 준 초인적인 후각으로 인간을 현혹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향수를 만들면서, 향수 제조법을 배워간다.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한 그르누이는 향수제조판매업체를 떠난다. 이유는 인간 냄새 덩어리가 넘치는 파리라는 도시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인간의 흔적이 없는 동굴 속에서 거주하던 그는 다시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도제자격증이 그의 신분을 보장해줬기에 이동에 어려움이 없어서 쉽게 다시 인간들이 사는 도시에 정착할 수 있었고, 그가 만들고 싶은 향수, 그가 꼭 가지고 싶은 사람의 냄새를 소유하기 위해서 25명의 소녀를 살해한다. 그러다가 정의 구현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르누이는 아무도 모르게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흉악한 살인자 그르누이는 이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총아로 거듭난다. 25번 째 소녀를 극진히 사랑했던 아버지, 권력자 리시조차 그의 딸을 살해한 그르누이를 양아들로 맞아들일 정도였다. 그러나 우월한 승리의 기쁨을 즐기지 않고, 자신의 발밑에서 조아리는 모든 사람에게 비웃음을 던지고 그르누이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 스스로 시종잡배들에게 몸을 던져 그를 먹어치우게 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않게 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르누이의 잔혹성은 어디서 시작한 걸까?

이 질문에 앞서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르누이는 사랑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 악취가 풍기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그가 죽기를 바라는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리고 유모에게 길러졌으나, 젖을 많이 먹고, 아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악마로 여겨져 신부에게 전달된다. 신부도 처음에는 우호적으로 그르누이를 보살피려 했으나, 극복하지 못하고 보육비를 대주기로 약정하고 보육원으로 보내버린다. 그곳에서는 어땠을까? 돈 이상의 것은 절대 해주지 않는 보호자 아래서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하다가 보육비가 끊기자 무두질공방으로 팔려간다. 그리고 다시 향수제조판매업체로.

이런 경험을 태어나서부터 계속 했으니, 그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셈이다. 그에게 사랑이라는 언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그는 향기에 집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집착이 잘못됐다고 지적해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의 초인적인 후각을 이용하려는 사람만 만났을 뿐이다. 잔혹한 주인공이 아니라, 세상이 잔혹함을 그르누이를 통해서 일갈(一喝)하고 있는 듯하다.

◆영원할 수 없다는 두려움

그르누이가 살해한 소녀는 스물여섯 명이다. 그와 관계돼 죽은 사람까지 더하면 더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 죽었다. 그러나 작품은 그를 잔인한 살인자로 느껴지지 않게 한다. 물론, 그의 살인을 정당화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선악 간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선악이라는 언어를 배운 적 없는 그르누이에게 세상의 법, 세상의 윤리 따위는 아무 소용없다. 그래서 작가는 그의 사형을 유보시켰다. 실제로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형이 집행될 수 없었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데, 그 경중을 판단하는 법으로 그르누이를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르누이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가 사랑하는 일을 한 것뿐이다. 물론, 그게 다른 사람의 목숨을 뺏는 일이었기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음을 그는 알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좋은 향기를 소유하기 위한 욕망, 그것을 충족하려는 짐승의 본능이 더 중요한 그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없었다. 그가 두려워한 일은 오직 그가 좋아하는 향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향기를 소유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다시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그는 너무나 당황했다. 그 향기를 얼마 동안이나 소유할 수 있을까?”(본문 중)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지고 싶은 것을 조금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또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 시점 아닐까? 정점에 도달한 인기 연예인이나, 정치적으로 더 오를 곳이 없을만큼 오른 사람들 등이 걱정하는 것은 내리막이 아닐까? 그르누이는 스스로 그 내리막을 선택한다.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신이 될 수 있었던 사나이, 그러나 죽음을 택하다

그는 향기 하나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의 명령이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의 소멸 이외에 걱정거리가 없었던 그에게 세상의 영웅, 왕, 신이 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가 만든 인위적인 향기 아래서는 계급이 사라지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종교가 사라지고, 금욕이 사라지고, 청렴이 사라지고, 복수가 사라졌다.

모두 그르누이의 향기로 인해서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고 짐승이 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르누이는 자신의 발아래서 짐승이 되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보다는 승리의 비웃음을 던졌다. 그리고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 떠난다. 역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건드려 그를 조각조각 찢어 먹게 만들어 버린다.

고통을 느끼며 죽어간 게 아니라, 역시 비웃음을 지으며 죽어 갔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살 가치조차 없는 곳이었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단 한 번도 사랑 받지 못했고, 존중 받지 못했던 세상에서 그는 고독을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면서 인간을 피해 살았다. 아니, 평생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바로 향기였다.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향기를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영원한 향기(권력)는 없다

향기는 영향력, 혹은 권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 작품 속 향기는 분명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혹하기도 했고, 착각을 일으키게도 했고, 찬양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가 그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사람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영원’이라는 언어를 품지 못했다. 시간의 한계 속에서 그르누이는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소멸하기로 마음먹는다.

우리 현실을 좀 보자. 오늘이 영원인 듯, 혹은 4년이 영원인 듯, 혹은 5년이 영원인 듯 살아가는 사람이 제법 된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일 수 없듯이 곧 끝이 보일 수밖에 없다. 총통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가 부하의 총탄에 사망했고, 그 전에 국부로 추앙받았던 이승만도 스스로 하야해야만 했다. 휴전선 넘어 이북의 권력도 승계가 됐을 뿐 영원을 누리지는 못했다. 아마, 어느 시점에는 그들의 과오가 청산될 것이다. “한치 앞도 모른다”라는 옛말이 있다. 그래서 오늘 날 우리 정치적 현실이 혼탁한 듯하다. 지혜가 없고, 오늘만 살아가는 하루살이의 안타까운 버둥거림만 있는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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