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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19)]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모비 딕』

- 모든 게 ‘제로 섬’이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7.31 22:06 | 최종 수정 2023.08.10 01:55 의견 0

대부분의 성인 중에 『모비 딕』 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흰 고래’로 동화책으로도 나오고 시시때때로 TV에서 만화 영화로도 방영했으니, 개인의 호불호로 인해 덜 보고, 더 보고의 차이는 있어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작으로 읽은 사람은 아주 드문 데, 고래잡이라는 단순한 모험 스토리가 아니라, 고래에 대해서는 백과사전만큼 방대한 지식을 제공함과 더불어, 누구를 주인공이라 생각하는가에 따라 작품을 읽고 느끼는 게 다른데다, 가독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모험을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다면, 재미있게 읽기 어렵다. 아울러 성경적 인물을 메타포로 한 등장인물들까지 여럿 등장하니, 배경 지식의 정도에 따라 작품의 풍미를 느끼는 수준도 달라진다. 물론, 이런 점은 모든 고전에 똑같이 적용된다.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

멜빌의 작품은 『모비 딕』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알려진 작품이 많지 않다. 필자도 여러 작품을 살펴보려 했으나, 돈을 주고도 구매하기 힘들어 본 작품 외에 읽어 볼 수 없었다. 본 작품은 특이한 구성과 더불어 소설로서는 다소 실험적이다보니 잘 짜여진 스토리가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고래와 관련한 다양한 설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장면마다 디테일한 설명과 생생한 고래잡이를 묘사하는데, 작가가 실제로 상선의 수습 선원으로 항해한 경험이 있고, 이후에도 포경선의 선원과 미 해군으로 5년 정도 태평양을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 작품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한 작품이었고, 작가가 평생 생활고를 힘겨워 했던 점을 생각하면 작품 속 배경이 되는 태평양 안에서의 모진 풍파는 작가의 삶을 은유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울러 본 작품과 함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함께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두 작품 모두 바다를 다루고, 물고기와의 사투를 다룬다. 결말 역시, 얻은 것 없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평행 이론을 연상할 만큼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스케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멜빌은 인생의 바다, 인간의 욕망 등을 태평양이라는 배경에서 다루고 있고, 헤밍웨이는 같은 이야기를 먼 바다에서 벌인 큰 물고기와의 사투로 다루고 있으니 규모면에서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선원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쓴 멜빌과 낚시광으로서 작품을 쓴 헤밍웨이의 경험 차이라고 해두자.


◆인간의 욕망

자크 라캉은 『욕망 이론』에서 인간이 꿋꿋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동력 중 하나로 ‘욕망’을 주장한다. 다른 말로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 듯한데, 어쨌든 뭔가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앞서 『모비 딕』은 주인공을 누구로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욕망을 키워드로 뽑으면 주인공을 당연히 에이해브 선장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그는 모비 딕에게 다리를 잃는 아픔을 겪고 복수를 위해 무한정 바다로 향한다. 복수를 위한 욕망, 복수를 달성했을 때 느낄 쾌감 등 이 모든 게 바로 욕망이다. 그냥 그대로 우리 삶에 대입해도 될 공식 아닌가?

예를 들어 보자. 학창 시절 나를 무시했던 친구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났을 때, 나 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친구를 보면서 만족했던 나, 연모했던 여인을 몇 년 간 쫓아 다녀서 결국 연인이 됐을 때의 행복감 등. 욕망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그 욕망을 달성했을 때 얻는 아드레날린은 굉장한 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욕망 충족에 대한 기쁨은 잠시고, 잠시 후 욕망은 더 커진다. 그리고 이런 욕망은 곧 마약효과를 낸다. 마약 중독자는 자신의 만족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더 큰 욕망이 생기면, 오로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주변을 돌보지 않는다. 결국 자신도 망가뜨린다.

에이해브는 성경에 등장하는 ‘아합 왕’이다. 아합은 이스라엘 왕으로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에이해브 선장 역시 독단적이고 폭력적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다가 정적 모비 딕과 운명한다. 당연하다.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니, 욕망을 추구했던 인간도 소멸한 것이다.

◆태평양 위에 떠 있는 돛단배의 역설

종종 겹치는 일을 진행할 때, “태평양 위에 돛단배 하나 더 띄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냐?”라고 말한다. 거대한 바다에 수많은 포경선이 떠 있다. 그들은 협력자일 때도 있지만, 경쟁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인간들끼리의 경쟁일 뿐, 바다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이 잡는 고래의 어획량은 줄어들어도 태평양의 물은 줄지 않는다. 줄어들어도 알 수가 없다. 목욕탕에서 스포이트로 물 한 방울 덜어 낸다고 해서 그 미세한 변화를 체감할 사람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거대한 대양 앞에서 그 굉장해 보이는 욕망은 넓은 태평양에 떠다니는 수많은 돛단배 수준에 불과하다. 어쩌면 작가는 욕망의 무의미함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거대한 고래를 잡고 함성을 지르지만, 그래봤자 고래 또한 거대한 대양 속에 작디 작은 동물일 뿐이야!”라고 말이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은 물론, 주변 부하들의 생명까지도 넓고 깊은 물속에 수장시켰다. 욕망은 철저히 개인적이어서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하다보면,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 때로는 민폐 수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말아 먹을 수도 있다. 거대한 우주적인 관점으로 볼 때, 개인의 욕망은 분명 작지만, 타인의 삶을 왜곡시킬 정도의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작은 돛단배의 역설은 바로 거대한 바다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지만, 누군가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게 ‘제로 섬’으로 수렴한다

‘제로 섬’은 경제학적인 용어다. 제로 섬(zero–sum)은 게임이나 경제 이론에서 여러 사람이 서로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이득의 총합이 항상 제로 또는 그 상태를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한 쪽이 커진다고 해서 총 합이 커지는 게 아니라 어차피 마이너스 상황이 있는 곳이 있으니, 총합은 제로로 수렴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제로섬 원리는 비단, 인간 경제상황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생태계에서도 제로섬을 경험한다. 빠른 발전으로 이룩한 경제성장은 결국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발전과 성장의 기쁨을 우려로 바꾸어버렸다. 인간만이 잘 사니, 다른 지구구성 요소가 마이너스에 도달한 것이다. 결론은 그 마이너스를 메우기 위해서 수많은 자원이 들어간다.

그 영역을 조금 좁혀서 우리나라 상황에 대입해 보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지 1년이 지났다. 지지율은 차치하더라도 정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종종 현 대통령을 두둔하는 논객들이 이런저런 방송에서 떠들어 대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1년이 지나도록 여야는 협치하지 않았고 오로지 대립으로 일관했다. 법안은 단독으로 통과되고 그러면 대통령이 거부하고. 엄청난 에너지 소모이며, 이런 소모적인 현상으로 인한 피해는 국민이 감당한다.

대표적인 이해 당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길거리로 나와서 대치한다.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이 싫어서 아마추어 정치인을 선출하니, 정치라는 말은 있으나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결론은 퇴임 후에 좋지 않은 관행을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능구렁이를 선출해도, 아마추어를 선출해도 메워야 할 구덩이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정치도 제로 섬이다.

부의 분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부익부 빈익빈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불만과 불평이 넘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어갈 비용은 점점 더 커진다. 역시 제로 섬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교육열을 생각해 보자. 치열하고 높은 교육열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뜨거워질 뿐 식지는 않는 교육열로 인해서 아이들이 죽어 나간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인구 감소의 원인 중 하나로 사교육비가 포함된다. 아이 키우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지나치면 그걸로 인한 반대급부가 등장해서 어렵게 만들어 낸 플러스가 다른 마이너스를 메우는 데 투여되고 만다. 수 천 년 전에 석가모니께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이 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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